나는 우리 아이들이 '엄마를 위해 살아야지'라며 효도하는 것보다, '엄마처럼 살아야지'라는 마음으로 살면 좋겠다.
부모를 위해 사는 자식은 애달프다. 부모의 고된 노동이 나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찢던 북어포는 내 학습지 값이고, 아빠가 밤샘 근무하던 젊은 날은 내 옷과 신발 값이었으니까.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도, 엄마는 취미생활보다 보험 영업을 택했고, 아빠는 술이나 담배 같은 퇴근 후 여흥을 즐기는 법 없이, 도서관에 있는 삼남매를 향해 다시 출근했다.
그렇게 컸다. 삼남매를 향했던 엄마와 아빠의 돈과 시간으로 어른이 됐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겠다 자주 생각했다. 어디까지 실천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의 빚이 무거웠다. 나 때문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먹을 것도 더 좋은 거 못 드신 부모님이 가엾으니 효도해야지.
그런데 이런 마음은 가난(빈곤) 포르노와 다를게 없다. 가난 포르노란 가난한 사람의 삶을 자극적으로 편집해, 보는이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소품으로 쓰는걸 말한다. 가난하다고 불쌍한 사람으로 분류해버리는건, 자본주의적 시선일 뿐이다. 사실은 우월감에 지나지 않을 동정은 아닌가.
부모님의 삶을 편집해서, 연민으로 대하는건 '효도 포르노'아닌가. 딱 자식의 입장일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서투른 자식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연민과 동정으로 변질되는 순간을 경계하지 못 했다.
부모님은 열심히 일해서 오는 뻐근한 만족감을 즐길 줄 아는 분이셨다. 오늘의 쾌락을 잠시 미루는 데서 오는 내일의 풍요를 쟁취할 줄 아는 분이셨다.
나는 '성실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나 만족감을 볼 안목이 없었다. 나는 왜 부모님을 늘 안쓰럽게만 생각했던걸까. 고단하다고만 생각했던걸까. 힘든 날도 있겠지만, 부모님은 사는 걸 즐겼다. 삼남매 무럭무럭 자라는걸 흥미롭게 지켜보셨다. 어렸던 나는 건방지게 부모님을 안타깝게만 여겼다. 부모님의 젊은 날이 오로지 '나'에게만 향해 있었다며, 부모 세상의 주인공이 바로 나일거라는 자기 중심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의 성실함을 닮을 생각을 먼저 했어야 했다. '부모님처럼 살아야지'. 이게 내가 갖춰야 했을 마음가짐이다.
자식을 둘 낳아,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내 옷 예산은 6개월 10만원이다. 하지만 딸아이 옷은 계절별(봄, 초여름, 한여름, 늦가을, 한겨울)로 10만원 남짓이다. 좋은 면의 옷을 마련한다. 내 점심은 라면이지만, 아이는 계란 한 알도 동물복지 유기농이다. 나는 간식을 따로 먹지 않지만, 아이들 하원하면 고구마를 삶아 먹이고, 딸기를 씻고, 요거트를 사놓는다.
나의 두 딸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엄마는 엄마 옷도 안 사면서, 우리 옷은 늘 좋은 걸로 챙겨주셨어.'
'내가 유치원에서 좋은 밥 먹는 동안, 엄마는 라면에 김치만 드셨지.'
'엄마 입도 입인데. 나만 요거트를 먹었어. 비싼 딸기 앞에 손을 떨며, 귤만 드셨던 것 같아.'
'이 모든게 다 나 때문이었던거야. 미안하고 감사하니 효도해야만해.'
저기, 얘들아. 감사한건 좋지만, 미안할 필요는 없단다.
10년 째 입는 나의 자켓은, 내가 먹는 라면은, 내가 참았던 요거트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금 입는 자켓이 멀쩡하니 더 사지 않았을 뿐이고, 라면이 좋았을 뿐이고, 배부른데 간식을 또 챙길 필요는 없었을 뿐이다.
순전히 내가 기뻐서다. 아이들을 사랑하니 내가 행복하다. 나의 만족이었고, 내가 좋아서 했던 일이고, 내가 선택한 일이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한 나의 노력들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지, 희생이나 헌신이 아니다. 몹시 다르다. 내가 괴로우면서까지 아이에게 온 몸을 갈아넣지는 않았다. 엄마가 되어 자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좋았고 행복하다. 감사한 일이다.
아이들이 나를 위해 좋은 성적을 받으려 애쓴다거나, 나를 위해 돈을 벌어 무언가를 사주지 않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나에게 빚진게 없다.
대신,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자기 자신이 좋아할만한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쓰길 바란다. 아이들이 타인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건, 엄마가 자기 삶의 행복을 궁리하며 집밥을 하고, 읽고 쓰며, 산책을 했던 모습을 기억해주는 거다. 난 나를 희생하지 않기위해 놀자며 다리에 매달려도, 거절하며 악착같이 책 읽는 엄마다. 내 모든 하루는 순전한 내 선택이니 아이들은 전혀 미안할 일 없다.
'엄마처럼 살면 참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부모로서 그만한 보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좋고, 애들도 좋고. 이거야 말로 육아계의 일석 이조 아닐까?
우리 두 딸이.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자신을 위해 살 줄 아는 안목을 갖출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