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물건보다 좋은 시간

by 최다혜

영혼까지 탈탈 털릴 때가 있다. 먹고 사는 일이 힘들면 그랬다. 번듯하게 살려고 돈을 벌 때는, 자주 먹고 사는 일이 시시하고 무기력해졌다. 하루종일 개미처럼 일해서 번 돈으로 시크하게 아우디 A7 쯤을 살 때는, 내 나이 몇 살 쯤일까? 나도 아이언맨처럼 아우디 멋드러지게 몰고 싶은데.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그놈의 아우디는 참 자주도 내 마음을 치고 들어왔다. 어쩌다 우리 차 옆으로 아우디 A7이 유유히 지나가면, 부러웠다. 부럽다는건 무의식 중에 지금 타고 있는 3년 채 되지 않은 하얀 올란도가 성에 안 찬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그깟 동그란 엠블럼 네 개 짜리! 좋은 차다. 그리고 우리 차도 좋은 차다. 사실, 차에 관심을 잃었다.

예전에는 나를 위한 선물하면 18k 목걸이나 귀걸이부터 탐냈다면, 이제는 돈 생기면 책방간다. 책방가면 책 읽을 수 있으니까!


애들 일찍 잠드는 이른 육아 퇴근일은, 아우디 A7보다 기쁘다. 밤 9시부터 생긴 자유 시간 동안, 글도 쓰고, 책도 읽고, 맥주도 마실 수 있으니까!


책과 글만으로 내 삶이 충분히 위로가 되고, 기운을 얻으니, 물건에 대한 욕심이 사라졌다. 비싼 명품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는걸 깨달았다. 소비 보다 생산 하는 삶을 좋아하니까, 어떤 물건에 대한 욕구는 '버킷 리스트'에 들어가지도 않게 되었다.


생산하는 재미를 알아버린 사람은 소비 욕구가 줄어든다.책 읽을 책상과 글 쓸 노트북만 있으면 오늘 하루 푸지게 재밌으니, 힘든 하루 위로 받기가 무척 간단하다. 매일 글 쓰면, 매일 욕구가 충족되고, 매일 책 읽으면, 매일 불만이 줄어든다. 그러니 도로 위 아우디 A7 쯤이야 지금 당장 없어도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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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모임, 작당(作黨) 멤버들과 자가출판 원고 작업에 들어갔다. 자가출판 플랫폼, 부크크의 원고 샘플 양식 위에, 그간 모아둔 글들을 정리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딱 세 편의 글만 정리해오기로 했다. 결혼, 태교일기, 열정, 미니멀라이프, 성장, 워킹맘 등에 대한 갖가지 주제로 모아봤다. 야무진 미경씨는 도서관에서 출력까지 해 왔다. 다들 감탄했다. 블로그에 썼던 글이, 번듯한 종이 위에 책처럼 놓여있었다.


미경씨가 올려놓은 원고 위에, 책방의 책들을 갖다 대어보며 책 사이즈도 가늠했다. 가장 대중적인 규격이라는 A5 책은 이런 느낌, 시나 에세이를 담는 B6 규격은 이런 느낌.


"짧은 글도 긴 글처럼 하려면 B6 좋겠네요!"


나름의 꼼수(?)들도 하나씩 얻어갔다. 긴 글처럼 늘리려는 착시효과까지 노리는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책 쓰겠다고 마음이 설렌 얼굴들이 상기되어 있었다.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말이 많아지고, 더 많이 웃었다.


매주 한 편 글쓰기로 했지만, 이제는 매주 한 편 쓰는 멤버가 잘 없다. 글쓰기 모임 미션이 아니더라도, 각자 쓰고 싶은 글을 조용조용 쓰고 있었다. 글쓰는 즐거움을 알아버리면,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쓰게 된다.


나도 그랬다. 가능하면 하루 한 편 글을 썼다. 끄적이지 않았다면 휘발되어 사라졌을 집밥, 육아, 책들을 모두 블로그 안에 고스란히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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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단순 재미로만 끝나지도 않았다. 글쓰기 멤버들과 작업을 시작한 자가 출판 책도 한 권씩 생길거고, 육아일기와 절약일기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을 하면서 기사로 남겼다. 때로는 블로그에 남긴 절약 일기를 보고 방송국에서 연락을 주셔서, 녹음을 하거나 녹화를 했다.


최근에는 교보문고와 SBS 소속 아나운서들이 전하는 책 이야기, '아나운서점'의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첫 대본은 <트렌드 코리아 2020>였다. 이 대본을 바탕으로 이인권 아나운서께서 책소개를 해 주셨다. 대본을 중심으로 하지만, 아나운서 개인 역량으로 시의적절한 멘트를 날렸다. 밋밋했던 대본이 다채로워졌고, 맛깔났다.


업로드 된, <트렌드 코리아 2020>을 보면서 '구성: 최다혜'라는 그 글자가 어찌나 뿌듯하던지.


읽고 쓰는 삶이 가져다주는 경험들 덕분에, 영혼 탈탈 털린 날에는 맥주를 들고 서재로 들어간다. 맥주 마시면서 책 읽고 글을 쓴다. 공들여 쓰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려 단잠을 잔다. 공허하지 않으니 아우디 A7이 내 마음을 헤집지 않는다.


생산은 소비를 막아주는 절약 촉진제였다. 좋은 물건보다 좋은 시간을 누리는 즐거움을 알아버린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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