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술에 살고 술에 죽는 술생술사들을 위하여

by 경희

빛나는 술무살

나는 딱 스무살이 되던 해의 1월 1일에 술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물론 고등학생 때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는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술을 마시지 않은 이유는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한마디로 공식적인 성인이 되는 순간에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술을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대로 1월 1일에 술을 처음 맛보게 되었고, 동시에 엄청난 신세계를 경험했다. 또래 친구들보다 술을 잘 마시는 편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나는 자연스레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매일 음주를 즐겼다. 술을 마신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그 다다다음날도 수차례 술을 마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맨정신보다 거의 절반 이상이 취해있던 상태가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약 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술을 아주 좋아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김혼비 작가님처럼 나는 첫 술을 마시고 내가 사실 배추라고 고백하지도, 박사장님의 에세이처럼 보리차에 분개해 첫 술을 마시지도 않을만큼 나의 첫술은 매우 평범했다. 그래서 박사장님처럼 이 책에 대한 헌사를 나의 첫 술에 대한 이야기로 바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스무살 내내 마시고 또 마셨던 술이 모두가 나의 첫 술로 자리잡고 있다고는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항상 첫 '술'을 마시는 것처럼 '술'을 마셨던 나의 빛나는 '술'무살 때문일 것이다.


​​처음처럼 레퍼토리

나의 술 인생에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이들은 나와 고등학교 삼학년 때 같은반이었던 아이들로, 지금까지 나와 가장 많은 술자리를 함께했다. 졸업과 동시에 엄연한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 우리는 사이좋게 돌아가며 서로의 취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술친구가 되었다. 웃기게도 이들과의 술자리 레퍼토리는 항상 똑같았다.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네 명으로 여자인 라, 남자인 석과 주로 구성되어 있는데, 멀리 이사를 가버린 라가 막차를 타야 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항상 동네에서 오후 다섯시쯤 술자리를 시작하곤 했다. 막차 시간은 밤 열 한시. 그 전까지 미친듯이 술을 달려야하는 셈이다. 그리고 막차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이들은 폭주를 하기 시작한다. 라는 이들이 권하는 술을 모두 받아 먹지 않고 집에 가야 한다며 손사레를 친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기 때문에 거의 술자리에서의 모든 시간은 거칠게 술을 권하는 석과 주, 불안한 눈빛의 라, 그리고 그걸 깔깔 웃으며 지켜보는 나의 무한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라가 막차 시간이 다가와도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애초에 라는 집에 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항상 라는 술을 마시다 물 흐르듯 막차를 놓치게 되고, 의리 짱인 우리는 라의 첫차를 함께 기다려주곤 했다. 첫차는 아침 다섯 시. 그렇게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항상 아침 다섯 시까지 술을 마셨다. 취하는 건 둘째치고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누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른 채 우리는 막차를 놓치고 첫차를 기다려준다는 핑계로 열심히 술을 마셨다. 이럴거면 대체 왜 오후 다섯시에 만나는건지 의문이 들곤 했지만 이 레퍼토리는 그로부터 무려 삼 년 동안 계속되었다. 항상 우리는 라가 막차를 놓친 순간에 외치곤 했다.


“또 막차 놓쳤지? 그럴 줄 알았어. 여기 처음처럼 하나요”


그렇다. 막차를 놓친 순간 처음처럼을 시키는 이 주문이 바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끔찍한 레퍼토리의 시작이였던 것이다.


​​​취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을 취할때까지 마시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네 명의 친구들과는 술을 마실 때 절대 빠꾸를 치지 말자는 의미로 노빠꾸팸이라는 이름을 지어 불렀다. 하지만 나는 술을 도저히 먹지 못하겠는데 왜 술을 마셔야하냐고 반문했지만 그 당시 술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나이인 스무살이었던 이들에게는 내 말이 도통 통하지 않았다. 고민고민하다 결국 떠올린 최후의 방법은 바로 몰래 술을 버리는 것이었다. 이 엄청난 방법을 알게된 후로부터 나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술을 버리곤 했다. 이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 뒤로 고개를 꺾을 때, 나는 재빠른 손목 스냅으로 내 물잔에 술을 버린 후 술을 마신 척 기깔나게 연기를 했다. 이들은 "역시 경희는 진짜 잘 마신다니까. 그럼 짠~!" 하며 다시 내 연기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듯했다. 다행히도 내 술 버리기 스킬은 꽤 고급이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낀 나는 무거운 분위기를 잡고 마치 중대발표라도 할 것처럼 지금까지 술을 몇 번 버렸다며 양심고백을 했다. 물론 친구들은 모두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부터 나는 참회의 의미로 술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주와 둘이 함께한 술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엣날 버릇이 튀어나와 주가 화장실을 간 사이 자연스러운 이끌림으로 술을 버렸고, 이미 내가 술을 버린 전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주는 귀신같이 이를 캐치했다. 나에게 크게 실망한 주는 매우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이제 너랑 술 못 마시겠다.“


그 당시 내 전부였던 술을 나와 먹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남들이 보면 내가 바람이라도 핀 것마냥 엄청나게 큰 잘못을 저질러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저 친구가 없는 사이에 몰래 술을 버린 죄로 죄인이 되어 펑펑 울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것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 노빠꾸 친구들은 아무도 술을 강요하지 않는다. 술을 마실때마다 마시고 죽어야했던 미숙한 스무살이었기 때문에 겪었던 치기 어린 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 누구보다 건강한 술자리를 가지며 짠을 하면서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점잖은 말을 내뱉는다. 드디어 우리가 어엿한 성인이 된 것일까. 하지만 나는 다 큰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 속에서 그 귀여운 강요가 이따금씩 생각나곤 한다.


​​괜찮은데?

사실 내게는 술을 마실때마다 두드러지게 보이는 주사가 딱히 없다. 대다수가 속이 안좋아 음식물을 다시 내뱉은 후 잠에 빠져드는 경우이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면 바로 “괜찮은데?” 일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진짜 괜찮을 때에도, 괜찮지 않을 때에도,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 모를 때에도 두루두루 쓰인다. 하지만 천천히 취기가 달아오른 후 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조금 달리 나는 중간이 없기 때문에 진짜 괜찮다가도 한순간에 픽 쓰러지곤 했다. 이렇게 술은 좋아하지만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나는 내 취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괜찮은 척을 한다. 진짜 취하지 않았을 때에도 괜찮은데?, 누가 봐도 취해 보일 때에도 괜찮은데?, 취해서 친구들이 낑낑거리며 집을 바래다줄 때 찍은 동영상을 봐도 나는 괜찮은데? 라는 말만 끊임없이 반복할 뿐이다. 이 괜찮은데? 는 나와 함께 술을 마신다면 술자리가 시작함과 동시에 끝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괜찮은데? 는 집에 가서도 계속된다. 집에 가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운 나를 보며 엄마가 방문을 열고 괜찮냐고 물어봐도 나는,


“괜찮은데? 깜빡 잠이 들어버렸네?”


라고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화장실로 걸어들어가 곧바로 음식물을 내뱉곤 했다. 나도 술을 마시면 다른 친구들처럼 혀도 짧아져 보고 싶고, 주사랍시고 나름 귀여운 애교도 부려보고 싶지만 나는 우뚝 서서 괜찮다는 말만 반복한다. 이는 맨정신에 항상 괜찮다고 말하는 삶을 살아온 탓에 술을 마시고 취해서도 괜찮지 않다고 말하지 못하는 조금 서글픈 버릇이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술

이 책의 저자인 김혼비 작가님처럼 술 마시는 것을 사랑하는 나 또한 술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술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내 생각대로 이미 나온 책이 있었고, 저자의 술 인생을 돌이켜보며 나의 술 인생 또한 함께 돌이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시콜콜한 술 인생을 들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나의 술 인생 중 기억에 남는 재미난 이야기들 몇 가지를 공유해 보았다. 같은 술꾼으로서 책에 은근히 나오는, 예를 들면 걷술 같은 꿀팁들을 새롭게 얻을 수 있어서 좋았고, 내 심금을 울리는 멋진 술에 대한 명언을 감탄스러워하며 옮겨적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실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그녀의 술자리에 함께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동시에 거리두기로 인해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 저자가 술자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주를 따르는 소리. 술자리에서 나는 소리 중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는 바로 나와 함께 술을 마시는 친구들의 '말소리' 이다. 나는 온전히 이 말소리를 듣고, 이 말소리를 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기 때문이다. 술에 살고 술에 죽는 술생술사의 인생을 살아온 나. 지금까지 참 많은 날을 술과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빨리 예전처럼 아무 걱정 없이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꿔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술이 마시고 싶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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