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밑줄로부터 시작된 사랑

by 경희

책 속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다가 다른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 흔적만을 보고 그 사람의 존재를 찾고 싶었던 적은 없었지만, 콩스탕스는 달랐다. 지난번에 읽었을 때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밑줄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나타나는 여러 밑줄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밑줄 긋는 남자를 찾기 위해 나선다. 이렇게 ‘책’이라는 연결고리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소재는 나에게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전화번호를 알지 못해도 페이스북과 같은 SNS로 검색하면 바로 내가 찾고 싶은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발빠른 세상에서, 종이 위에, 그리고 그 글자 위에 그어져 있는 밑줄을 보며 모르는 누군가와 소통을 하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책 속에 흠뻑 젖어 있다는 점이 좋았다. 카카오톡 메시지보다 투박한 글자 사이에 정성이 묻어있는 손편지가, 전자책보다 손으로 느껴지는 종이책의 한 페이지를 넘길 때 괜시리 기분이 간질간질 해졌던 어느날을 떠올리면서. 이 옛스러운 감성을 가진 밑줄 긋는 남자는 콩스탕스를 더 끌여당겼고, 나 또한 콩스탕스의 손을 잡고 책 속으로 더욱더 끌려들어갔다.​

만들어진 존재

처음에 콩스탕스가 밑줄을 왜 남자가 그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물론 점점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밑줄 긋는 사람이 남자임은 분명해 지지만, 왜 처음부터 남자라고 단정한 것인지는 다소 의아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콩스탕스가 왜 그랬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콩스탕스가 열렬히 ‘사랑’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사랑을 필요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해야 비로소 자신 또한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그 밑줄 긋는 남자를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대로 만들어 갔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가 누구였던 콩스탕스가 분명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미 밑줄 긋는 남자는 단순히 그 존재로서가 아닌, 그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 남자의 존재 자체가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속에서 오는 호기심은 사랑으로 이끌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하지 않아서 관심이 가고, 수수께끼처럼 풀고 싶은 사람이라면 나 또한 콩스탕스처럼 그 존재를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섰을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이상 사이

책 속에는 상상의 존재인 밑줄 긋는 남자 말고도 파니, 미슈 아저씨, 지젤 등 콩스탕스의 여러 주변 사람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콩스탕스가 간절히 원하는 열망을, 또 그녀가 느끼는 부족함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즉, 콩스탕스를 위로해 주는 이는 그녀의 주변에 실재하는 사람들이 아닌 밑줄 긋는 남자라는 것이다. 콩스탕스는 이 둘을 완벽히 분리시켜 놓은 듯해 보인다. 왜 주변 사람들은 콩스탕스의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했을까? 물론 사랑하는 사람만이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분명 따로 존재하겠지만, 현실에서 콩스탕스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면 이토록 사랑에 집착하며 갈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콩스탕스를 꿈꾸게 하는 사람이, 또 그녀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단지 그녀의 상상 속의 존재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상상 속의 존재 또한 그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어쩌면 진정으로 콩스탕스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 뿐일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결국 이상의 존재에게 자신을 맡겨버린 콩스탕스의 옆에 만약 내가 있었다면,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사랑을 주고 싶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콩스탕스는 그 자체로 충분히 사랑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밑줄을 그어주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온 마음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상대가 나타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상태에 놓여져있는 콩스탕스가 왠지 모르게 부러웠다. 그래서 나 또한 사랑이 하고 싶어졌다. 콩스탕스처럼 상대방의 외모와 재력을 이것저것 재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 하는, 순수한 사랑이 하고 싶어졌다. 그런 사랑이야말로 나 스스로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지 않을까. 그리고 내 존재를 명확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나의 조용한 일상에도 누군가가 밑줄을 그어주어 조금은 소란스럽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내 ‘인생’에 밑줄을 그어주는 밑줄 긋는 남자가 어느 날 나에게도 문득 찾아와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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