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이들에게
우리집에서 콩불먹고 갈래?
우리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라는 말보다 우리집에서 콩불먹고 갈래라는 말에 더 설레는 나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콩불! 콩불은 콩나물과 불고기를 함께 매콤한 소스에 볶아먹다가 마지막에는 볶음밥까지 볶아먹는 매우 훌륭한 음식으로, 나는 동네에 있는 한 콩불집을 무려 십 일년 째 방문하고 있는 꽤나 멋진 이력을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같은 가게에서 음식을 먹다보니 이제는 나만의 콩불 먹는법이 생겼다. 먼저 들어가자마자 콩불 매운맛을 인원수에 맞게 주문한다. 이름만 매운맛일 뿐 실제로 그리 맵지는 않다. 여기서 잠깐! 꼭 우동사리를 같이 주문한다. 달짝지근한 콩불과 통통한 우동사리는 그야말로 환상에 환상에 환상을 더한 조합이다. 콩불이 맛스럽게 익어가는 동안 뜨끈한 미역국과 밥을 미리 떠놓는다. 나중에 굳이 추가하지 않고 남은 밥을 볶아도 괜찮기 때문에 절반은 볶음밥용으로 센스있게 남겨둔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그 앞에 나란히 놓여져있는 반찬으로 눈을 돌린다. 반찬으로는 단무지, 깍두기, 피클이 있다.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콩불을 먹기 전에 반찬을 다 먹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콩불 조리는 알아서 해주시므로 나는 가만히 앉아서 반찬을 맛보고 있기만 하면 된다. 콩불이 다 익으면 콩불과 우동사리를 함께 집어 천천히 맛을 음미한다. 맛있다를 약 십 회 정도 내뱉으면서 먹다보면, 그새 콩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이 때, 당당하게 손을 든다. 여기 볶음밥 볶아주세요! 그리고는 아까 센스있게 남겨놓은 밥을 볶는다. 이렇게 볶음밥까지 먹고 배를 두드리며 나와야 진정한 콩불을 먹은 것이다. 때때로 사장님은 이런 내 모습을 나지막이 쳐다보시고는 몇 살이냐고 물어보시곤 한다. 사장님 기억 속으로는 민낯에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어느새 업그레이드된 화장 기술을 한채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며 무언가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 맞아요, 저 스물다섯 살 이에요. 콩불이 오천원일때부터 팔천오백원이 된 지금까지 함께했어요. 그러니까 음료수 서비스 주세요. 사실 사장님과 나만 아는 비밀이 한 가지 있다. 콩불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중학교 때부터 온갖 친구들을 다 콩불집으로 초대하는 습관이 있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먹으면 더 좋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순수한 마음은 훗날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중학교 때 처음 사귄 같은반 남친부터 시작해 나 혼자 짝사랑한 오빠, 사귀진 않고 썸만 타다 끝난 후배, 전남친, 전전남친, 전전전남친까지 십 년 동안 나를 거쳐간 복잡한 관계들을 사장님께 생중계로 다 보여드린 셈인 것이다. 이정도면 나와 정식으로 만나기 전에 콩불을 한 끼 식사로 먹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도 성스러운 의식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사장님은 이 사실을 아실 리가 없다. 아무래도 사장님은 모르고 나 혼자만 아는 비밀인 것 같다. 애석하게도 콩불 사장님은 십 년째 내 이름조차 모르실테지만, 내가 콩불을 좋아한다는 변함없는 사실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계실테다. 사람도, 사랑도 언젠가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이라도 질리기 마련인데 콩불은 이렇게나 먹는데도 그렇지 않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앞으로도 사장님께 열심히 콩불을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조만간 보여드리러 가야겠다.
빠빠빨간맛 궁금해 허니
세상에는 참 감사하게도 다양한 맛들이 존재해주고 있다. 달콤한 맛, 짭쪼름한 맛, 씁쓸한 맛, 고소한 맛, 감칠맛 나는 맛, 그리고 매운맛. 모든 맛들을 사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은 단연 빠빠빨간맛 궁금해 허니. 매운맛이다. 웃기게도 나는 매운맛을 그저 좋아하지도, 딱히 싫어하지도, 굳이 즐겨 먹지도 않는 편이었다. 주로 함께 음식을 주문하는 친구들의 의견을 따라 신라면 맵기의 매운맛도 먹을지 말지 가만히 서서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레 매운맛을 즐기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새하얗게 몰랐다. 내가 매운맛을 매우 잘 먹는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한낮의 한강에서의 기억이 문득 피어난다. 한강에서 주로 엽기떡볶이, 즉 엽떡을 좋아하는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엽떡을 주문하기 위해 메뉴판을 천천히 살폈다. 하지만 엽떡을 주문할 때는 항상 매운맛 단계 선택에 충돌이 생기는 법. 나는 언제나 그렇듯 초보맛을 먹자고 했고, 나와 처음 엽떡을 먹는 원은 무려 가장 매운 맛인 5단계를 먹자고 주장했다. 당연히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엽떡 매운맛을 먹자고?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미친 줄 알았다. 하지만 원은 무조건 매운맛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게 아니면 아예 엽떡을 먹지 않겠다며 승부수를 띄웠다. 진지하게 엽떡을 먹고 싶었던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도착한 무시무시한 엽떡. 그날따라 유난히 엽떡이 더 새빨갛게 보였던 것은 기분탓일까. 조심스레 떡볶이를 하나 집어 먹어보았다. 오물오물 먹다보니 생각보다 먹을만 했다. 심지어 지금까지 먹었던 엽떡보다 더 맛있었다. 가장 매운맛인 5단계라는 이름이 주는 무서움 때문에 맵게 느껴졌을 뿐 실제 맵기는 나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운맛을 넘어선 씁쓸한 맛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홀로 엽떡 매운맛을 끝까지 맛있게 먹었고, 같이 먹던 원은 그런 나를 보며 놀라워하면서 동시에 매워했고, 나는 알았다. 세상에, 내가 매운 것을 잘 먹는구나. 나 그런 멋진 사람이었구나. 나 이런 사람이야를 외치며 그 날 이후로 매운맛에 잔뜩 빠져버린 나는 불닭볶음면을 당당하게 쿨피스 없이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신라면에 청양고추 두 개를 송송 썰어넣어 먹었고, 종종 한강에서 엽떡 매운맛을 시켜먹으며 이게 진정한 엽떡이라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지금도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주문할 때면 신라면 맵기의 매운맛을 먹을지 말지 가만히 서서 고민한다. 여전히 마지막에는 친구들의 의견에 따르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사이에 한 마디가 더해졌다는 것이다. “얘들아. 한 단계만 더 맵게 먹으면 안될까?” 이제는 빨간맛을 완벽하게 즐기고 있다.
사랑아 집밥해
살아가면서 성격이 바뀌듯 입맛도 조금씩 바뀌어간다. 친구들을 만나서 밥을 먹을 때면 메뉴 선정에 있어서 인스타그램 업로드를 놓칠 수 없다. 무엇보다 비주얼이 화려해야하고, 당연히 맛도 있어야하며, 더불어 분위기도 좋아야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려면 주로 감성뿜뿜에 핫플인 파스타 가게를 가는 것이 대다수일테다. 종종 부대찌개나 순댓국이 먹고 싶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뜨끈한 국밥을 먹자고 했을 때의 정적을 이길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줄곧 이 결정에 늘 만족스러워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스무살이 되고 대학교에 입학해 예기치 않게 혼자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직접 밥을 해서 먹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마저도 귀찮아져 안하게 되었고 그렇게 매 끼를 사먹어야 했다. 처음에는 사먹는다는 것이 꽤나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가장 먹고싶은 메뉴를 직접 고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찬도 다채로워 더 먹음직스럽게 보였으며, 아침이든 새벽이든 먹는 시간까지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였다. 늦은 시간에 먹지 못하게 할 뿐더러 배달 음식과도 친하지 않았던 우리집을 생각하면 천국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내 입맛이 조금씩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새빨간 양념치킨 보다는 새빨간 김치찌개가, 새하얀 까르보나라 보다는 새하얀 쌀밥이, 샛노란 감자튀김 보다는 샛노란 계란말이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지, 또 내일은 무엇을 먹을지, 또 그 다음날은 무엇을 먹을지 매 순간 고민인 자취생에게 집밥만큼 그리운 것은 없었다. 늘 그렇듯 식탁 위에 차려진 밥을 아무 생각 없이 매 끼마다 먹기만 하는 것이 그만큼 소중한 것인지 몰랐다. 그렇게 나는 점점 밥을 찾기 시작했고, 한 끼를 그저 국에 밥을 몽땅 말아서 먹을 때 묘한 행복감을 느꼈다. 종종 본가에 갈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 된장찌개와 계란말이가 먹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내가 집에 갈 때마다 엄마는 내가 말한대로 김이 폴폴나는 된장찌개와 말랑말랑한 계란말이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덕분에 든든히 집밥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또 다시 자취방으로 내려가 또 몇 주일 동안 집밥을 그리워했다. 지금은 이제 졸업을 해 자취방을 정리하고 예전처럼 집에 들어와 살고 있다. 엄마는 종종 말씀하신다. 경희는 참 집밥을 잘 먹어. 얘는 밖에서 사먹는 음식보다 집에서 먹는 밥이 더 좋은가봐.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밖에 나가 살아보니 그 모든것이 당연하지 않더라고요. 집에서 먹는 밥이 참 소중한 것이더라고요. 그렇게 나는 오늘도 엄마가 한가득 꾹꾹 눌러담은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며 칭찬 받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