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이 아닌 약속이라고 불러주세요
가벼운 책임
가벼운 책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책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지기 마련인데, 가벼운 책임이라니. 줄곧 나의 장점에 대해 써야하는 칸이 있으면 책임감을 적어내곤 했다. 어린이였을 때부터 너무 많은 것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일지도 모를 수많은 일들에 밤낮으로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는 줄곧 반장이나 회장과 같은 임원을 하면서 반 친구들을 리드하며 나서는 것을 좋아했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책임자의 자리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것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했을 때 나에게 돌아올 화살, 내가 끝까지 지고 나가야할 무게, 그에 따른 참혹한 결과를 책임지기가 점점 두려워졌다. 그 자리에 서있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편한 자리를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꼭꼭 숨어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책임에 대해 너무 무겁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도 모르게 작디 작은 책임들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작디 작은 책임일지라도, 책임들은 어떻게든 계속해서 쌓이고 쌓여가기 마련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늦지 않게 시간을 맞춰 나가고, 우리집에 있는 물고기의 밥을 제때 챙겨주는 것. 이를 책임이 아니라 약속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나는 나와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 것이다. 이 조그마한 약속들이 모여 가벼운 책임이 되고, 더 나아가 어엿한 책임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무거운 책임
삶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할 때는 바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이는 동물권에 대한 여러 책들을 읽고 내린 결론이다. 책을 읽을수록 나는 더더욱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위해 친구들과 있다가 집에 일찍 들어갈 자신도, 매일 밤 함께 산책을 갈 자신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지켜볼 자신은 더더욱 없다. 사실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그 이후로 아무리 시간이 겹겹이 쌓여도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지 않고 영원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만 같다. 결국 나는 이 무거운 책임을 지는 일에 대해 시작하지 않기로 했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으면 되니까. 단지 귀여워서 키우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시작하지 마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고 또 생각해라.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이다. 그러니 책임을 질 자신이 없다면 그저 가만히 지켜보며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