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전부였던 때가 있었잖아요
친구가 전부였던 때가 있었잖아요
소설 속의 다현이는 참으로 나와 많이 닮아 있다. 다현이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가 마치 나의 중학생 시절과 자꾸만 겹쳐 보였기 때문일까. 아람이의 짐을 어쩔 수 없이 아람이 집에 가져다 놓고, 친구들이 맞는 말이라고 하면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의 불편함보다 친구들의 편함을 더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나 또한 같았다. 지금보다 훨씬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중학교 1학년 때, 집에 같이 가는 친구를 항상 집 앞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나는 학원에 가야 하지만 친구가 원하면 어쩔 수 없이 함께 놀곤 했다. 학원이 끝나면 배는 고프지만 돈이 없는 친구를 위해 간식이나 음료를 사주곤 했다. 이는 모두 친구를 위한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억지로’ 친구를 위한 행동이었다. 확실히 싫다고 말하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면 괜찮았을 텐데 왜 그렇게 혼자 힘들어 하면서까지 친구를 위했던 걸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친구’가 전부였다. 내 모든 세상은 ‘친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은, 특히 중학생은 더욱이 확고하게 무리를 지어서 놀곤 한다. 내가 정말 어떤 아이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무리로 인해 내가 반에서 어떤 아이인지, 즉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인지 노는 아이인지 결정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둘 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놀 줄 아는 아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반에서 나름 나쁘지 않은, 공부만 하지도 놀기만 하지도 않는 평범한 무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들은 나를 무시하는 눈빛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바보같이 친구들의 요구를 뜻대로 들어주고, 하라는 대로 다 해주는 나와 그들에게는 이미 친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수평적으로 동일한 선상의 친구가 아닌, 훨씬 그 아래였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그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앉아야 할 때 우두커니 혼자 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그들과 나는 갈라졌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이렇게 불편한 관계는 애초부터 이런 결말로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다현이가 썼던 체리새우 비밀 블로그처럼 나의 비밀 다이어리에 그들처럼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말아야지,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지 수십 번 다짐했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흐르고 더 좋은 친구들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행히도 그 시간이 찾아와 주었다.
온 마음으로 다현이를 이해한다. 남들은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가볍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상황을 겪어본 나로서는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다현이에게 섣부른 충고보다는 작은 끄덕임을 보내고 싶다. 함께 있을 때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친구는 이미 좋은 친구가 아니니까.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친구야말로 진정한 친구니까. 혹여나 다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도 반 배정이 목숨보다 중요했을 때가 있었잖아요. 친구들에게 미움 받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웠던 때가 있었잖아요. ‘친구’가 전부였던 때가 있었잖아요. 아이들이 읽으면 앞으로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올바른 마음을 작게나마 심어주고, 어른들이 읽으면 그때의 내가 잘 이겨 내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도 ‘친구’가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다현이처럼, 다섯 손가락 친구들처럼, 그때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