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보다 평화롭게 안양에서 살고 있었다. 일곱 살 때 과천에서 안양으로 이사를 와 당연하듯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안양에서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안성에 있는 대학교를 가게 되어 예기치 못하게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버스로 첫차를 타도 오전 수업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합격의 기쁨을 누리느라 아직 혼자 살아야 할 준비도 하지 못한 채 강제로 안양을 벗어나야 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품을 떠나 혼자만의 삶을 꿈꾸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단지 안성도 같은 경기도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안성과 안양은 한 글자 차이라고 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안성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안성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매일 엄마가 해주던 빨래, 아빠가 돌려주던 청소기를 모두 내가 맡아 하려니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집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온전히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점차 나만의 방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설거지, 분리수거, 청소 등 웬만한 집안일은 척척 잘 해냈지만 밥을 차리는 것만큼은 밖에서 사 먹는 것으로 의존했다. 혼자 사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학교생활에 적응할 틈도 없이 모든 생활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단지 씩씩함으로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 영상을 전공한 터라 날마다 촬영장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고, 때로는 시험 기간에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촬영장과 자취방을 오가면서 치열하게 살아갔다. 물론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밤을 새운 적도 많았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핑계로 매번 술자리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촬영하는 작품에 대해, 관심 가는 사람에 대해,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청춘을 나누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평일이 지나고 나고 주말이 찾아오면 종종 본가를 갈 수 있었다. 본가에 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이 걱정 어린 안부 대신 따뜻한 된장찌개와 꾹꾹 눌러 담은 밥 한 공기를 내밀어 주셨다. 이는 안성에서 제대로 먹지 못한 끼니를 배부르게 채워주면서 다시 안성에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에너지가 되어주었다. 이렇게 안양과 안성을 계속해서 오가다가 지금은 졸업을 하고 예전처럼 안양에서 살고 있다. 때때로 안성에서 혼자 살았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바로 이 기억이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순간이었다는 점은 확실할 테다. 언젠가 내게 나태함이 찾아올 때, 그때의 치열한 순간을 떠올리며 나 자신을 다시 다잡고 싶은 마음이다.
이렇듯 나에게 경기도는 ‘청춘’이다. 태어났던 과천과 나고 자란 안양을 지나 활기찼던 안성을 거쳐 비로소 내 모든 청춘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님 품을 떠나 갑자기 혼자 살게 되었던, 서투르고 또 미숙했던,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아름다웠던 내 청춘. 나는 단 한순간도 경기도를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없다. 경기도는 내 청춘이 완성된 곳이다. 반짝이는 추억도, 평생을 갈 친구도 모두 이곳에서 만들어간 만큼 소중하다. 앞으로 또 어떤 인연을 경기도에서 만나게 될지, 어떤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경기도에서 만들게 될지 참으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