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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Feb 05. 2017

그러니까 그다음은

충분히 벌어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실은, 나도 자주 하는 편이다. 다른 게 있다면, 나는 보통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다음’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설명하곤 하는데, 단순히 ‘하고 싶은 것’과 ‘꿈’이라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차, 좋은 집을 소유하는 것. 당연히 바라는 바다. 아주 솔직히, 나는 현재의 물질적 수준이 이전보다 더 향상되는 데 적잖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누리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굳이 거부하고 싶진 않다. 좀 그런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문제는 바로 그다음인데, 그전에 잠시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도록 하자. 당신은 크게 성공한 사업가로 매 달 소위 억 소리 나는 자산을 축적시키고 있으며 다량의 스포츠카를 보유 중임과 동시에 국내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조망이 뛰어나다는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다. 화목한 가정은 두말할 것 없고. 그런데, 인간이란 도통 알 수가 없는 동물이라 그렇게도 원했던 삶을 마침내 이루고 나면, 그러니까 쌓인 업무들을 간신이 끝낸 다음 마치 지면에 수렴할 듯 날렵한 스포츠카를 타고 강변을 멋지게 달려 집에 도착했을 때, 온갖 치장과 미술품, 그리고 가족들이 반기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일상적 패턴이 반복된다면 언젠가 또 다른 무언가를 갈망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질과 화목, 안정, 편리와 같은 것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가장 순수하고 찬란한, 때로는 위험하고 도전적인 무언가를 말이다.


스티브 잡스는 병으로 죽기 전, ‘소위 부라는 것은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도만 되면 충분하다. 그다음으로는 인간과 예술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며 나의 존재를 계속해서 혁신시키는데 집중하길 바란다.’고 격언처럼 강조했었다. 특수한 지위와 자산을 가졌던 사람이기에 적용 가능한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정말 그렇다. 만약 당신의 삶이 끝나가는 시점에 담담히 그동안의 시간들을 반추해 본다면, ‘학생으로서의 이십몇 년, 회사원으로서의 삼십 년, 연금 수혜자로서의 무난한 노후’와 같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편적인 주제들이 이토록 무미건조하다면 확실히 조금은 슬플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꿈은 ‘하고 싶은 것’의 범주에 담아둘 수 없는, 훨씬 더 고차원적인 개념임에 틀림없다. 살아가면서 꿈을 명확히 하고 싶어 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왜’를 끌어들이게 된다.


‘궁극적으로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혹은 ‘이런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와 같은 바람들이 떠오를 때, 도대체 왜 그것들이 이루고 싶은 대상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생각이 깊은 고민으로 바뀌어서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거나 흔들릴 때도 있다. 어찌 됐든 그러다가, ‘그게 가장 나다워지는 것 같은데’ 혹은 ‘그걸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그저 행복할 수밖에 없겠는데’라는 자기 응답에 이르게 되면 정말이지 꿈은, 저 멀리 수억 년 정도 떨어진 행성과 같이 결코 경험해 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곧 죽어도 내가 반드시 이것만은 해야겠다고 고집부리며 투쟁했던 모든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생성된 퇴적물, 그것이 내 가슴속에 착 내려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는 자아와 맞닿게 되는 순간,


아마도 그러한 삶이 가장 진실하고 이상적인 생이 아닐까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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