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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Feb 16. 2017

about MOIVE_엘리펀트

진짜 가해자는 '우리'다

<굿 윌 헌팅>, <아이다호>, <프라미스드 랜드>, <파인딩 포레스터>, <밀크> 등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작품은 항상 잊을만하면 찾아보고 싶게끔 만드는 기묘한 매력이 있다.


8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이 훅 하고 지나간 다음에
나는 어떤 씁쓸함과 죄의식을 동시에 느꼈다.


이어서 이 작품이 구스 반 산트의 작품 중 가장 디스토피아적 이리라 확신하게 되었다. 앞선 리뷰 <자전거 탄 소년>과 마찬가지로 결국 이 영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가해자, 즉 화면 밖의 우리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집단 따돌림의 주체 즉, 가해자들은 한 순간에 피살자가 된다.

미국의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모티브로 한 본 작품은 철저히 관망하는 시선으로 영상의 흐름을 풀어낸다. 더하지 않고 빼지도 않는다. 그 날의 16분 동안 벌어진 끔찍한 비극에 관하여 어떠한 설명이나 이유를 대사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을 일상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례대로 소개하는 교차편집, 리얼리즘의 극대화를 위해 적용된 롱테이크와 동선 추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현장에 있는 것만 같은 불편한 사실감을 효과적으로 느끼게 한다. 진실로 이 영화의 메시지 전달과 여운을 증폭시키는 데 있어서 촬영 기법의 공이 상당히 컸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을 하나씩 따라가는 카메라가 곧 우리들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직전의 상황.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대사와 소리를 최대한 배제시켰다. 그리하여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든다. 인물들의 관계가 명확해지면 질수록 그 생각들은 마침내 확신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러한 결과가 도출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릇, 집단 따돌림이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빈번하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상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 소위 '일진'이라는 개념을 실제로 접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들이 자행하는 일련의 괴롭힘에 대한 주체와 객체의 시선이 완전히 상극이라는 것이다. 수직적 관계의 위에 있는 자들은 그러한 행위들이 '아무렇지 않은' 일상 중 한 부분이지만, 그 아래에 있는 즉, 핍박받는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그들이 탈이성적 행동을 하게 되는 가장 명백한 원인이 된다. 영화 내에서는 총기 난사의 주인공들이 실제로 '괴롭힘'을 당한다고 판단되는 장면이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데, 그것조차도 신체 접촉하는 직접적 폭력이 아닌, 단순히 친구들끼리 가볍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 일그러지는 표정이라든가 화장실에서 옷에 묻은 종이 찌꺼기들을 힘 없이 털어내는 장면을 통해 지금껏 수없이 괴롭힘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과 그 정도가 한 소년이 버티기엔 이미 너무나 버거운 위치에 도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사건의 주인공역인 알렉스와 에릭.

인위적인 소리가 거의 배제되어 있기는 하나, 사건이 발생하기 전 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알렉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장면에서 알렉스라는 인물의 본성이 처음부터 무자비한 살인을 단행할 정도로 타락한 것이 아님을 최소한으로 변론해주는 듯하다. 아름다운 선율이 폭발하는 총기 소음으로 변모하게 된 이유는 곧, 소통의 단절과 공동체의 냉소다. 집에서 보내는 식사 시간에 알렉스의 부모는 별 말없이 '문단속 잘하라.'는 말만 남기고 각자 일을 위해 조용히 집을 빠져나간다. 이 짧은 찰나의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아주 쉽게 가족 간 소통의 부재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집과 엇비슷하게 시간을 많이 보내는 학교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와 달리 이미 그들에게 '일상'이란 곧 탈출하고 싶은 지옥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우리는, 이 사회는 뭔가를 했어야만 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알렉스의 예술적 감성을 알아봐 주었다면, 따듯한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넸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비록, 완전한 구원이 불가능하더라도 무고한 희생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가장 처음 소개되는 인물 존은 공실에서 홀로 눈물을 훔친다. 삶의 무게가 너무나 버겁지만 마땅히 토로할 곳이 없어 그렇게 적막 속에서 삭히는 것이다. 그 순간, 한 여학생이 그곳으로 들어와 존에게 '무슨 일이냐'뭐 말을 걸고 눈물이 떨어지는 존의 뺨 위로 가볍게 키스한 뒤 사라진다.


사건 당시 실제 CCTV 영상에 찍힌 알렉스와 에릭.

알렉스와 에릭에게도 그 키스가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방관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탓에 음지의 그들에게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렇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그들의 만행을 '쓰레기 같은 짓'이라며 마냥 욕할 수 없는 이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물론, 피살자들을 생각하면 감정적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실은 그 피살자들을 포함하여 학교의 학생과 교직원, 나아가 미국의 사회와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까지, 기민하지 않으면 쉽게 체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미소한 '죄'를 조금씩 분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기의 따듯한 관심이란 그래서 중요한 것 같다. 만약 그것이 결여된다면, 자그마했던 불안과 혼란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커져 마침내 그들의 정체성과 이성을 잠식시키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기심을 조금만 쪼개서 이타심으로 바꿔보자.



그리하여 '주변의' 누군가에게 여자 아이의 키스 같이 부드러운 손길을 내민다면, 이 사회가 보다 더 아름다워 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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