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극도의 상실감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을 때
영화는 이 남자의 정서에 공감하라고, 이해하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그러는 대신 천천히 그의 상실과 트라우마, 그로 인한 고독을 담담히 응시할 뿐이다. 어떠한 해답도, 해피엔딩도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가 끝나갈 무렵 그들의 앞날이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적 염원을 그리게 된다. 그렇기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그 순간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잔잔하지만 묵직한' 여운이란 무릇,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주인공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의 삶은 말 그대로 '시궁창'이 되어버렸다. 관객들은 중반쯤이 되어서야 이 남자의 무기력함과 무표정의 근원적 이유들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 장면 이후로는 고구마를 급하게 먹은 듯 목이 메어 굵직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된다. 마구 쏟아내는 눈물이 아니다.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뜨거움'을 인지할 때쯤 되면, 우리는 그토록 힘겹게 '버텨왔던'과거의 기억들을 오버랩시키게 된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해야 할 말들을 꾹꾹 눌러담으면서 이 곳 저곳을 가만히 응시한다.
영화의 연출 방식이 깊게 와 닿을 수 있었던 것은 '억지스러움'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칫 '신파 코드'로 흘러갈 수 있는 비극적 스토리를 '보란 듯이' 터트리는 대신, 살짝 옆으로 비켜 선 채 그가 자의적으로 억제하고 있는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계속해서 말없이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선, 술집에서의 충동적인 주먹다짐, 홀로 방에 서있다 갑자기 주먹으로 창문을 깨는, 지나가는 행인의 툭 던지는 말에 경우 없이 발끈하는 일련의 장면들을 보면, 이 남자의 내부는 이미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바늘로 톡 찌르기만 해도 그것은 곧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로 치환되어 버린다. 그래서 남자는 스스로 '억제하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는데, 바로 '무기력과 무표정'이다. 온전한 '감정'을 느껴보려는 찰나, 순식간에 터져버린 트라우마가 자꾸만 그의 존재를 과거에 묶어두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축은 사실상 삼촌 '리'와 조카 '패트릭'이다. 그들은, 각자 상실의 아픔을 가지고 있으며 원치 않았던 동행으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한다. 삼촌으로서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어야 함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는 순간, '리'는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반대로 거절하지도 못한다. 그 순간,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의 '좋았던 나날들'을 떠올리는 장면이 삽입되는데, 다소 개연성 없는 등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 자체로 관객이 '리'의 복잡한 심정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현재' 자신의 삶은 너무나 버겁고 위태롭지만, '과거' 패트릭과 함께 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니 마냥 이 아이를 내팽개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어른으로서의 책임이며 동시에 조카를 향한 진심 어린 '사랑'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몇 번의 플래시백을 활용하여 현재 인물의 '그러함'에 대한 이유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또한, 맨체스터의 겨울 풍경을 정물화처럼 짧게 담아낸 장면들이 수시로 나오는데 이는 곧 등장인물들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자연'과 맨체스터라는 공간은 과거나 현재나 바뀐 것이 없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들은 차례대로 그 장면들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쓸쓸함'이 배가되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별 다른 설명 없이 '시선'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그 표현 방식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위와 같은 특징들이 참신하면서도 영화의 분위기에 적절한 연출기법이었다 생각한다.
어느 날, 패트릭은 냉동실을 열었다가 쏟아지는 냉동 육류들을 보고는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데 이는 곧,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혹은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한 소년이 사실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시련에 마주하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리는 결국 형의 친구인 '조지'에게 찾아가 패트릭의 입양을 부탁하게 되고, 이 사실을 패트릭에게 알리면서,
I can't beat it. I can't beat it. I'm sorry.
라고 말한다. 끝내 조카를 가족 아닌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리의 '그 마음'이 비로소 이해가 되어 또 우리들의 속이 꽉 틀어박히게 된다.
리의 고꾸라진 인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처 랜디(미셸 윌리엄스)의 등장은 아주 중요한 장면들이다. 그들은 화목하고 단란했던 가정을 꾸려나가다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게 되는데, 그래서 리는 형의 장례식장에 오는,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랜디(심지어 새 남편과 함께)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불편하고 거북하다. 서로가 그때의 상처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며 끝내 눈물을 보이지만, 리는 힘겹게 가슴을 부여잡은 채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 버린다.
오래간만에 조카와 배낚시를 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되는데, 우리는 그 장면을 자그마한 희망으로 바라보게 된다. 리나 패트릭이나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인생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맨체스터의 잔잔한 파도처럼 끝내 흘러갈 것임을 은유적으로 느끼게 된다.
더불어, 그곳으로부터 오는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할지언정
상실감에 묶여 남은 인생을 이전의 무기력한 그것으로 살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YOUNG_K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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