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창작한 음악과 라이프스타일이 내가 지향하는 바와 같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Alright>이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를 처음 봤을 때였는데, 6분 55초라는 뮤직비디오치곤 다소 긴 시간 동안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앞의 화면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필름 누아르를 연상시키는 흑백 영상과 담대하게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미장센처럼 자연과 사람을 느릿하게 훑으며 지나가는 이미지들의 나열이 마치 웰 메이드 ‘페이크 다큐’한 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그는 음악을 일차원적인 청각의 즐거움으로 한정 짓지 않고 그 속에 사회 비판적인 관점을 심어 일종의 '연대의식'을 창조해냈다.
본 곡이 시작되기 전 약 2분 동안, ‘백인 경찰관들의 흑인 과잉 진압’을 풍자하는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암묵적으로 자행되는 인종 차별을 정면으로 풍자한다. 또한 후렴구를 통해, ‘나는 항상 싸워야 했고, 우리의 인생은 엿 같지만 신이 우리를 보듬고 있다면 결국 괜찮아질 거야.’라며 핍박받는 흑인 공동체를 향해 위로를 전한다. 지면에서 뜬 몸이 나비처럼 날아가는 장면은 그들의 육체가 탄압받을지언정 영혼만은 결코 통제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가 화면 밖으로 던져주는 메시지가 너무나 명료하고 강단졌기에, 나는 단숨에 매료되고 말았다. 뮤직비디오를 보고 진정 ‘예술작품’이라 생각이 들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티스트라고 상업적인 활동을 일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삶과 일 사이의 밸런스를 잃지도 않는다. 자신이 있어야 할 영역과 해야 할 본분을 잊지 않고 본래의 자리에 머물며 꾸준히 자신만의 색깔을 고수해 나가는 그의 행보가 나에게 많은 영감과 용기를 주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길. 오롯이 나만이 가진,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진하게 확산시키고 싶다. 그러나 고지식한 외골수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단지 적당한 지점에 서서 발휘하고자 하는 능력껏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와 연결되어 있는 삶을 지향한다.
힙합이 ‘켄드릭 라마’의 정체성 중 가장 핵심적 요소라면, 지금의 나로서는 ‘작문’이 그러한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나는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 발가벗겨진다. 숨기고 싶었던 치부들을 드러내고, ‘좋은 사람 되기’ 필터를 깨부숴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순도 백 퍼센트가 된 '나'를 공개적인 커뮤니티에 내던진다. 이상하게 수치스럽지가 않다. 오히려 순수한 희열과 행복감이 충만해진다. 필시 주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더불어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인생이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 현실의 만족보다 영혼의 행복을 우선으로 여기는 태도는 꽤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알고 있지 않은가. 끝이 다가올수록 그때 그리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붙잡을 수 없는 후회의 대상으로 귀속시킬 것임을. 뒤늦은 회한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하자.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했을 때 당신이 가장 행복한지, 가장 당신다워지는지.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은 이십대라면 아무것도 잃을 것 없는 이 순간,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늘어나기 전에, 모든 정신과 육체를 태워보자. 우리의 순수한 창의력은 켄드릭 라마의 그것과 근본이 다르지 않다. 그가 무대 위에서 신적인 존재가 되듯이 우리도 각자의 무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위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고유한 존재가 될 수 있다.
혹시 아는가. 그와 같이 이미 크고 화려한 무대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공연의 오프닝 무대로 초청해줄지. 설사 그런 일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 이상 후회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