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스포일러 일부 포함.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을 감상했다.
여태 그토록 건조하고 묵직한 엔딩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울림이 툭 하고 가슴을 쳤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장면에서 갑작스레 엔딩 크레디트로 전환되어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와 비슷하게 밀려드는 여운이 나를 충분히 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파도같이 느껴졌다.
보육원에서 지내는 열한 살 소년 시릴. 소년은 아버지의 재회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며 탈출과 수소문을 반복하지만, 이내 아버지가 자신이 소중히 아끼던 자전거를 팔아버림과 동시에 자신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 동네 미용실 주인 사만다가 직접 시릴의 위탁모 역할을 맡게 되고, 사만다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얼룩 진 시릴을 따듯하게 감싸주지만 급변한 환경이 익숙지 않아 자꾸만 엇나가려 하는 탓에 쉬이 유대를 쌓지 못한다. 그 틈을 타 비행 청소년인 웨스가 시릴에게 접근하여 절도 범죄를 교사한다. 시릴은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다가와주는 웨스에게 맹목적인 정을 느끼게 되고 그의 주문대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일이 꼬여버리고 두려운 마음에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절대 다시 찾아오지 마.’라는 차가운 대답만 듣게 된다. 결국 소년은 마지막으로 페달을 세차게 밟는다. 그리고 유일하게 진실한 사랑으로 보듬어주었던 그 사람에게로 회귀한다.
사실, 이 영화는 다소 불편한 장면들이 꽤 많다. 아마도 그러한 불편함은 내가 ‘어른’으로서 느끼게 되는 어떠한 공동의 죄의식일 것이다. 가족에 대한 소년의 사랑과 믿음이 짓밟히는 순간, 그것들은 일종의 자학과 이해할 수 없는 과잉행동으로 뒤바뀌어 주변 사람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희한하게도 나는 분명 화면 밖에 있는데 그러한 광경을 멀찍이 서서 지켜보는 주변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과연, 누가 그 소년을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정상적인 소통의 방식이 차단되어 버린 성장기의 소년은 단지 잠시 머무를 곳이 필요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리웠고, 그들의 사랑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굳건한 믿음은 내팽개쳐졌고 무참히 짓밟혔다.
사만다는 ‘현대사회의 당위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물론 그 소년은 그녀의 친아들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연결고리도 존재하지 않는,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아들이지만 끝내 자신이 ‘부모’의 역할을 도맡아야겠다는 출처 모를 책임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갈수록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반하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으며, 어느 한 인격체의 성장에 있어서 건강한 ‘어른’의 보살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역설한다.
엔딩 장면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자전거를 타고 사만다의 집으로 향하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한 동안 화면에서 눈을 거둘 수가 없었다. 상반된 감정인 미안함과 대견함이 동시에 내 볼을 천천히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영화인 걸 알면서도 나는 소년이 더 이상 자전거에서 넘어지지 않기를, 앞으로 어떤 시련과 고통이 찾아와도 지금처럼 담대하게 이겨내기를 기도했다.
좋은 영화 한 편은 우리가 잊고 지내던 인간적 가치를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하며, 기어코 영화 속으로 끌어들여 그것을 ‘함께’ 체험하도록 만든다. 이러니 다양성 영화를 찾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들만이 전해 줄 수 있는, 잊고 있었던 마이너 감성과 폐부를 찌르는 한방이 너무나 시큰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