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데 드는 에너지가 크게 소모적이라는 것을 몸소 느낀 것은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다. 그전까지는 나는 '나'로 불려 왔기에 불특정 한 누군가와의 만남이 버겁지 않았다. 나의 행동은 어느 정도 예상 범위에 있었고, 나의 마음은 어느 정도 내 안의 바운더리를 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라는 사람과 전혀 별도의 '아이'라는 존재로 인하여 나의 모든 것이 평가되었다. 아이가 하는 행동반경은 늘 예상 밖에 있었다. 단 한치도 예상 범위 안에 있다는 안정감을 누리지 못한 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상 밖의 범위를 미리 가늠하다 지쳐버렸다. 내게는 불필요했던 대화가 나를 위해서가 아닌 아이를 위해서 필수가 되었다. 내가 대화에 속함으로써 혹시라도 나중에 닥칠 예상 밖의 범주에서 우리 아이가 조금이라도 안전하길 바라면서, 나는 고요히 사색하고 마음을 정리하는데 드는 에너지를 과감하게 포기한 채 십 년을 살아왔다.
첫째 아이의 주장이 고집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하여 설명을 했다. 단톡방에서도 놀이터에서도 내가 아닌 어떤 새로운 형태의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머리를 조아릴 줄 알아야 했고 아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아이의 합당한 이유를 사람들에게 이해시켜야 했다. 엄마들에게는 혹시라도 우리 아이의 주장이 미움을 사지 않게 노력해야 했고 더 잘해야 했다. 아이에게는 이런 상황을 아이의 언어에 맞게 나의 감정을 배제한 채 설명하고 훈육해야 했다.
십여 년을 이 짓을 하고 나가떨어졌다. 어느 순간 마음 안에서는 불쑥불쑥 '나'라는 자아가 말을 한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 "어찌 보면 우리 아이의 주장이 너무나 합당하지 않은가.",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닌가.", "왜 어른이 나서서 아이들을 편을 가르는 것일까." , "어쩌면 어른들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 "아이들이 아이들끼리 해결하게 기회를 주고 싶다.", "왜 사사건건 부모가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그러다 보니, 나는 첫째 아이의 엄마일 때 보다 둘째 아이의 엄마일 때가 점점 더 좋아졌다. 둘째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는 나는 ‘우아하고 다정한 엄마’가 될 수 있다. 어른들이 하는 말에 토시 하나 안 달고 말을 잘 듣는 아이,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늘 양보를 자청하고 다정하고 색이 없는 아이, 슬프고 억울하고 속상한 일은 혼자서 삼키고 우는 아이, 욕심을 부리지 않는 아이. 나의 어린 시절을 너무나도 닮은 아이, 나는 그런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모순스럽게 나는 이런 둘째 아이의 엄마일 때가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그 사실에 목이 멘다. 살아오며 논리적이고 자기주장을 잘하는 색이 강한 사람을 동경하였다. 그런 사람이 내 첫째 아이가 되었다. 내가 가장 동경하지만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유형의 사람이 자식일 경우의 나의 모습이 끔찍하다. 아이가 어디로 튈지 몰라 두렵고, 아이의 주장 앞에 사람들의 반응이 늘 두렵다.
늘 자신을 숨기고 남에게 모든 것을 맞추고, 감정을 삼키는 사람이 싫었다. 그 안에 곪아 썩어가는 속내를 알기에 싫었다. 나의 아이만큼은 나처럼 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사람이 내 둘째 아이가 되었다. 내가 가장 되고 싶지 않은 모습의 사람이 자식일 경우의 나의 모습이 좋다. 아이의 아픔을 보면서도 나는 더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런 이중적인 나의 모습이 역겹고 혐오스럽다.
이런 육아의 번뇌 앞에서 나의 말은 늘 한 생명을 기죽이고 가능성을 밟아버리는 오염된 언어였다. 그러나, 글은 조금 달랐다. 서툴고 거친 날 것의 말들을 글로 내뱉어버린 날이면 괴로웠다. 날것의 글들은 기존의 오염된 나의 생각과 말의 폭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낱낱이 보게 했다. 좋은 엄마이기를 애초에 포기하고 그저 괜찮은 엄마이기를 바랐던 마음마저도 저만치 보내 놓고 이제는 옆에 있는 엄마인 것에 만족하며 지내던 날들. 살고 싶어 글을 썼던 육아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모아놓고 바라본다. 그러고 나면 어쩌면 나는 꽤나 괜찮은 사람인 것도 같았다. 내 안에 그동안에 없던 새로운 언어들이 태어나는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서서히 글 안에서 말하는 내가 진짜 내가 되는 것 같았다.
잔소리 대신 글쓰기를 택했다. 아이를 기죽이는 언어 대신, 아이의 삶을 응원하는 언어를 택했다. 매일 밤 아이에게 잔소리 대신 이야기를 지어 들려주었다. 스토리는 억지였고 개연성도 떨어졌지만 아이는 곰곰이 들어주었다. 아이가 조금씩 살을 붙여주기도 하고, 여러 날에 걸쳐 말로 쓰인 잠자리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마지막으로 작품 소개란에 이렇게 소개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공공이지만 엄마의 사랑과 새로운 도전을 통하여 성장하는 이야기예요. 자신의 빛을 잃지 않으면서도 아름답게 공들의 세계에 융화되는 공공이의 모습을 그린 귀엽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남긴다.
"나의 빛을 잃지 않아도 함께 어울려 놀 수 있어요."
"엄마, 그거 알아? 공공이나 진짜 나 같다?"
"그래? 그거 참 신기하네. 우리 안이가 그래서 공공이 이야기를 좋아하나 봐."
"엄마, 이거 그림도 있어?"
"안이가 그려줄래?"
"좋아."
아이는 들은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정성껏 두 장을 그려주었다. 반짝 빛나는 공공이나 된 우리 아이, 실 생활에서도 공공이 엄마처럼 그렇게 말해주고 기다려줄 걸 그랬다는 마음과 이렇게라도 아이에게 위로가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포개진다. 이야기 속 공공 이를 믿어주고 공공이가 빛났 듯, 나의 아이 역시 자신의 강한 색들을 아름답게 뿜어내어 융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이야기를 쓸 때의 마음이 퇴색할 때면 다시 꺼내 읽는다.
"엄마는 우리 공공이나 친구들과 잘 지내게 돼서 정말 기뻐. 공공이나 해낼 줄 알았어. 공공아, 네가 친구들에게 맞춰준다고 해서 정체성을 잃는 것이 절대 아니야. 충분히 네 탱그러움을 간직하면서 함께 놀 수 있단다. 오늘을 꼭 기억해, 알았지?"
나중에 언젠가 책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 내 까짓 게 감히 무슨. "이라는 자기 검열만큼이나 무지한 나의 정보는 대놓고 발목을 잡는다. 부족한 글쓰기 실력만큼 전혀 모르고 있는 출판계의 프로세스가 존재한다. 정보맹에 컴맹이라 실질적인 장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다행이다. 이렇게 아이와 함께 만든 동화가 종이로 된 책으로 나와서 내 앞에 실재한다는 사실이. 그래서, 감사하다. 아이에게 그래도 엄마가 직접 하나 써준 이야기만큼은 책으로 남아, 아이의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의 아이를 위해서는 꽤나 괜찮은 사람이 되어, 꽤나 괜찮은 작가로서 고심하며 만든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종이로 된 얇은 책 한 권 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만든다. 아이가 그려준 표지를 안고 행복한 웃음을 짓고 오늘을 남긴다. 비록, 아무도 모르는 책이지만 내가 지은 첫 책이 나왔다.
아이를 오염시키는 언어가 아닌 아이를 응원하는 언어로 쓴 꽤나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하며, 잠시나마 행복에 젖어 이 기분을 마음껏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