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웠던 겨울날, 문득 봄이 찾아왔다
캄캄한 영원
그 오랜 기다림 속으로
햇살처럼 니가 내렸다
- 도깨비 OST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모두가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에 취해있던 작년 연말, 아내는 아직 가진통이 견딜만한 수준이라며, 아기가 예정일 그대로 태어날 것 같다고 신이 났었다. 우리의 출산 예정일은 1월이었으나, 초산의 경우 아기가 예정일보다 빨리 나온 경우가 워낙 많아 혹시나 아기가 12월에 태어나진 않을까 임신 기간 내내 마음을 졸였던 그녀였다.
신이 난 아내가 우리도 둘이 보내는 마지막 연말을 축하하자며, 오랜만에 세시셀라(Ceci Cela) 카페의 당근케잌이 먹고 싶다고, 그걸 꼭 사가지고 집에서 촛불을 불고 연말 기분을 내야겠다고 졸랐다.
마지막 임신 퀘스트(Quest)라고 생각했다. 임신 기간 중에도 별 다툼 없이 잘 지냈고, 크게 아내를 서운하게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만약 이 요청을 무시한다면 '만삭아내의 로망을 짓밟았던 무술년 당근케잌 사건'으로 불리며 내 주변 지인들과 후손에게 구전될 것만 같았다.
원초적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세시셀라로 향했고, 하늘의 뜻이었는지 단 한조각 남아있었던 당근케잌을 사고 집으로 향했다.
바로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케잌은 후식의 역할이었기에 식탁 대신 냉장고로 직행했고, 아내는 저녁 만찬에 어울리는 뭔가 기름진 음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예를 들면 '불맛이 나는 두꺼운 패티의 육즙이 뚝뚝 떨어지고 치지한 치즈가 올라간 미국스타일 수제버거' 같은...(예시를 들은 것이라 말하기엔 이상하리만치도 구체적이었다)
그런데 바스버거를 포함, 안타깝게도 우리 동네로 배달해주는 수제버거집이 없었다.
"내가 바스버거는 다음에 사올게! 일단 햄버거가 꼭 먹고 싶으면 동서고금 변함없는 표준 매뉴얼의 상징 맥도날드 어때?"
미드(였는지 영화음악에 대한 다큐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를 보며 맥도날드를 배불리 먹은 우리는 케잌은 다음 날 아침로 개봉연기하기로 합의를 했다. 밀린 청소와 아기용품 정리 등 적당한 가사노동 후 11시 경 좀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 끄응... 오빠..."
몇 시인지는 모르겠으나 눈을 뜨니 아직 어두운 밤 같았다. 날 부르는 아내의 신음섞인 소리에 잠을 깼다.
"괜찮아? 왜 그래?"
"진통이 좀 쎄졌어..."
나중에 들은 거지만 아내는 나를 깨우기 전 두 시간 가량 5~10분 정도의 간격으로 오는 큰 진통을 경험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전 며칠 간 아내가 7~15분 간격의 가진통을 경험하고 있었던 터라, 우리 둘다 점점 더 가진통의 세기가 세지는건가?정도로 생각하고, 그것이 출산을 예후하는 진진통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
"으아! 나 뭐가 나온 것 같애..."
급하게 일어나 불을 켰다. 침대는 무색의 액체로 잔뜩 젖어있었다. 산부인과 응급실에 전화를 하고, 몇 가지 질문을 통해 그 액체의 정체가 만삭 임산부들이 겪는 이슬 수준이 아니라 양수가 터진 것임을 알게 됐다. 우린 지금 막 출산과정의 공식적인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었다.
정신을 퍼뜩 차리고 고개를 들어 벽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지나친 계획주의자인 우리 부부는 며칠 전부터 산부인과와 조리원에 들고갈 짐들을 미리 엑셀 체크리스트와 함께 준비해놨지만 정작 내가 가져갈 짐은 안챙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키와 휴대폰 충전기, 여분 옷을 대충 가방에 쑤셔넣었다. 거실의 아내는 진통이 극에 달했는지 말도 못하고 1미터 걷고 쭈그려앉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행히 새벽이라 차가 막히지 않았다. 마포 집에서 산부인과가 있던 논현동까지 가는데 불과 12분 정도면 도착 예정이었다. 시속 120km를 훌쩍 넘게 달리는 올림픽대로의 과속택시들만 조심하면 됐다.
차에 탄 아내는 한창의 진통이 지나간 시점이었는지 약간 차분해진 상태였다. 히터를 최대로 틀었음에도 여전히 차안의 공기는 쌀쌀했다. 차가운 공기를 깨고, 정신을 차린 그녀가 조용하게 얘기했다.
"출산 직전 다들 고기 구워먹으면서 체력보충 한다는데, 난 맥도날드 먹고 낳는다니 서럽네..."
둘다 웃음이 터졌고 그제서야 나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산부인과 앞에 대충 주차를 하고 아내를 부축해 분만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아내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굳게 닫힌 문 뒤로 사라졌다.
아직 아내와 제대로 된 인사도 못했는데...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여기서 몇시간 동안 기다리는건가? 대기실이라기엔 엘레베이터 바로 앞인데? 나중에 들어갈 순 있는건가? 갑자기 5분 후에 "건강한 딸이네요"라며 애기를 들고 나오면 어쩌지? 손 씻고 있어야되나?'
초산이면 누구나 그렇듯, 프로세스를 전혀 몰랐기에 더욱 답답했다. 내가 뭘 해야하는지, 지금 아내가 뭘 하고 있는지 누가 알려주면 좋을텐데 어두운 복도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30여 분 후 비로소 문이 열렸고, 아내의 산전 검사가 모두 끝났다며, 다른 층에서 입원수속을 먼저 하고 가족분만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자궁은 벌써 3cm 열렸다고도 했다. 자궁문이 10cm가 열릴 때까지 이렇게 극도의 진통과 휴식을 3분 정도 주기로 반복하고, 10cm 정도 열려야만 이때부터 산모가 아래에 힘을 줘 아가를 낳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분만실이라기보다 대기실 같이 생긴 좁은 공간에 들어가니 창백해진 아내가 누워있었다. 앞으로 10cm까지 열릴 때까진 대략 네다섯 시간은 더 고생해야했다.
아내 옆에는 모니터가 있었는데 자궁의 수축 현황을 숫자 0~100으로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10 정도에 머무르던 수치는 대략 2~3분마다 70~80까지 치솟았고 그럴 때마다 아내는 비명도 못 질렀고 나는 아내의 손을 꽉 잡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
출산 관련 커뮤니티나 후기들을 보면 공통된 격언이 하나 있었다.
'무통천국 불신지옥'
점점 아내 몸 속으로 무통주사의 약효가 퍼지기 시작했다. 모니터 상 80까지 수치가 올라갔는데도 아내는 잠도 자고 웃으며 나와 수다를 떨기도 했다. 심지어 정상적인 상태로 마지막 사진을 남기자고도 했다. 현대의술의 힘이란...
한 시간 정도의 간격으로 간호사가 내진을 하며 자궁문을 확인했다. 4~5cm, 7~8cm... 문이 점점 열릴수록 아내 뱃속의 아기는 우리를 만나러 내려오고 있었다.
내진을 한 간호사가 자궁문이 거의 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힘주기 연습을 해야한다며 아기 낳는 자세를 알려준다고 했다.
"오빠는 이제 나가있어."
아내는 출산의 장면들이 너무 원초적이라 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냐. 난 여기서 손 잡아줄게. 난 너랑 언제까지나 함께 할거야!"
"아니 난 오빠가 피보고 기절할 것 같은데?"
"아... 그렇다면 바로 문 밖에 있을게!"
그때 왠지 모르게 영화 해바라기의 명장면이 잠깐 생각났다.
"병진이형 나가... 뒤지기 싫으면" 이런 느낌...
간호사들이 여럿 들어갔고 난 문 앞에 서서 순산을 기도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곧 응애응애 소리가 들리고, 탯줄을 자르러 들어오라고 하겠지?'
10분... 20분... 30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기들을 봤을 때 마지막 단계에서 대략 10~20분이면 아기가 나오던데...
그때 간호사가 날 호출했다. 드디어 나왔구나!
거의 뛰어들어가다시피 급하게 들어간 분만실엔, 하지만 의사 선생님도, 그 많던 간호사들도, 건강하게 울고 있을 아기도 없었다. 단지 아내가 흐느껴 울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이 철렁하며 만감이 교차했다.
뭐가 잘못됐나?아기는 낳고 어디로 급히 간건가? 아니면 자연분만 순산이 안돼서 혹시 제왕절개 수술을 결정해야 하는건가?
"오빠... 나 때문에 아기가 많이 힘들어해..."
나중에 들었지만, 아내가 힘을 주는 방법을 잘 몰라 아기가 나오다가 머리 부분이 잠깐 걸렸었고, 그 순간 아기의 맥박이 빠르게 떨어지며 들린 삐- 삐- 하는 기계음에, 아내는 너무나 소스라치게 놀라 더욱 힘이 빠졌던 응급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의료진은 일단 산모를 잠시 진정시키기 위해 나를 불렀던 것이었고, 아내는 걱정과 자책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잠깐의 재회 후, 의료진들이 다시 들어왔다.
"산모님, 한번 더 해볼게요. 잘 할 수 있어요."
이번에 나는 분만실 밖이 아니라, 아내와 커튼 하나만을 두고 서 있었다. 아내의 신음소리, 눈물 콧물 침을 넘기는 소리, 의료진들이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건네는 "잘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면 안돼요" 하는 냉탕온탕 격려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간호사가 앉아서 기다리라고 의자를 가져왔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지만 조바심이 나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일어서서 두 손을 꼭 잡고 내 인생에서 몇 번 없었던 절실한 기도를 했다.
'제발 산모가 건강하게 해 주세요.'
나중에 우리 딸이 들으면 섭섭할 말이지만...
물론 아기의 건강도 기도했지만, 그 땐 주로 아내의 건강과 안녕을 절실하게 기도했던 것 같다. 이유 모르게 계속 눈물이 흘렀고 눈물을 훔치며 기도했다.
매일 수십명의 산모 분만을 지켜보는 간호사들에겐 내가 좀 청승맞게 느껴졌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에겐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체감 몇 시간 같은 몇 분이 지났다.
"이제 보호자 들어오세요~"
여전히 아직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누워있던 아내를 바라봤다. 눈물 고인 눈을 서로 마주치며 무언의 감정을 교류했다.
"너무 고생 많았어."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하며 아내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나서야 비로소 아기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내 생각보다 더 작은 생명체가 내 생각보다 더 길다란 탯줄로 엄마와 연결되어 있었다. 아직 울음을 터뜨리진 않았지만,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엄마의 배 위에서 아빠에게 처음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271일의 평화적(?) 임신기간과 10시간의 전쟁같은 시간을 보내고, 수호(태명)가 우리를 찾아왔다.
질긴 탯줄을 두 번에 걸쳐 자르는 그 짧은 순간에, 세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1. 아내에게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다.
2. 엄마에게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다.
3. 잠깐만, 근데 진짜 이게 내 딸이라고...?내가 진짜 아빠라고...?
봉합수술을 시작한 아내를 뒤로 하고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은 채 아기와 옆방으로 이동했다.
임신 38주째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추정 무게는 3.2kg였는데 실제 몸무게는 3.0kg였다. 눈금이 순간적으로 2.8~2.9를 오갈 땐 이유없이 조마조마했다. (학점도 아니고 이게 뭐라고...)
아기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2019년 1월 1일 0시 출산으로 기해년 첫 신생아 왕좌를 노리던 나의 야심찬 꿈은 날아갔다.(사실 방송사 인터뷰를 대비한 멘트도 준비했었는데)
연말에 태어난 우리 아가는 자기보다 거의 1년 전에 태어난 거대 아린이들과 같은 어린이집 동기로 만나 치열한 어깨빵을 당하겠지... 아빠엄마 체구를 보면 그리 크지도 않을텐데 친구의 악의없는 장난에 밀려넘어져 서럽게 울곤 하겠지...
그것이 예정일을 다 못 채우고 연말에 태어나버린 그녀의 숙명임을 씁쓸하게 곱씹으며 입원병실로 아내를 보러갔다.
분만과정에서 바닥난 체력으로 힘이 많이 없어보였지만, 아내는 그제서야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태어나서 32년만에 비로소 '엄마'라는 위대한 호칭을 얻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빠, 집 냉장고에서 세시셀라 당근케잌 가지고 와."
엄마는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