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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단단 Jan 28. 2021

고장난 하루와 물에빠진 책

             

고장 난 하루다.

이런 날에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 또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런 날을 ‘고장 난 하루’라고 부른다.      

 나의 ‘고장 난 하루’가 성립이 되려면 몇 가지 특징이 있어야 한다. 우선, 말도 안 되게 날씨부터 흐린 날이거나 비가 오는 날일 것, 전날에 술을 진탕 마실 것, 커피를 너무 늦은 시간(주로 오후 12시를 지나 마시는)에 마셔 하룻밤을 하얗게 지새울 것, 대부분 이 모든 조건이 맞는 날이라면 그날은 꽤나 힘든 날이었음이 분명하니, 당연히 눈꺼풀은 무겁고 몸은 피폐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은 말할 것도 없다.


 어젯밤에서 오늘 새벽으로 이어지는 시간에 잠을 깨버리면 오늘이 몇 월 몇일인지에 대한 개념이 사라진다. 마음먹으면 밤을 새우는 것쯤 쉽겠지만 이렇게 억지로 경계를 허물게 되는 날이면 나는 몸이 두 배의 속도로 늙어버리는 느낌이 든다. 마치 밤의 비밀을 알아버려 저주를 받은 몸이나 된 것처럼.      

 이렇게 세 가지의 상황이 고루 맞아떨어질 날은 드물지만, 만일 그런 날이 오게 되면 나는 다음날 아침에 심각하게 고장 나 버린다. 물론 이 세 가지 상황 앞에 멀쩡한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고장 난 하루 앞에서의 나는 기가 막힌다. 우선 차례대로 사고를 친다.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기 위해 머신을 작동시키면 꼭 한 번은 다시 전원을 끄고 켜는 일을 해야 한다. 평소 대로라 하면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원두를 먼저 분쇄하며 머신을 세척하고 머그잔을 데우고 난 후 커피를 내려 마시는데, 이런 날은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전에 없던 오류도 생긴다. 사람이 고장 나 버리면 기계도 정신이 없다.      


 내 몸이 정신을 차렸는지 덜 차렸는지 궁금한 날에는 기계를 작동시켜보는 것이 좋다. 나는 그래서 아침을 커피를 내려 보는 일로 시작한다.      





오늘도 밤을 새웠다. 전날 저녁에 시나몬 라테를 너무 늦은 시간에 마셨다. 얼굴은 멀쩡한 빛을 띠는 것 같아서 정상일 것이라 생각했다.


 평소 잘 작동시켰던 커피머신은 세 번의 도전 끝에 제대로 내릴 수 있었고, 읽고 있던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거리 헤매기>는 물이 찬 개수대에 떨어뜨려 버렸다. 지금도 왜 그 책이 거기 떨어진 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게 문제다. 문제가 발생했는데 문제의 원인을 생각해 내지 못할 정도가 된다는 것.      


 정말 빳빳했던 새 책이었는데 쫄딱 젖어버려 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책을 냉동실에 급하게 얼릴 수밖에 없었다. 새 책은 주인을 잘못 만나 그렇게 헌책이 된다. 냉동실에 처박혀 일 년은 된 것 같은 투게더 아이스크림과 동태 여러 마리와 같이 자리한 책을 보니 대작가에게 꼭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내가 정말 존경해마지 않는 작가인데.


 자, 이게 바로 고장 난 자의 말로다. 이런 날은 억지로 이겨내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이기려다가 심각하게 바닥으로 처박힐 수 있으니까. 대신 고장 난 하루를 견딜 때마다 물에 빠진 책을 생각해야겠다.  안그런다면 또다시 오게 될 이런 날, 무엇이 또 나의 개수대에 오를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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