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름의 얼굴, 자리돔에 담긴 맛과 시간
어느 계절보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 그 한가운데에서 제주 바다는 작고 투박한 생선 한 마리를 내민다.
자리돔. 겉으로는 별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이 자그마한 생선 안에는 제주 여름의 기억과 시간,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5월이 되면 제주 어촌 마을 골목마다 울려 퍼지는 활어 트럭의 확성기 소리가 자리철의 시작을 알린다.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여름을 깨우는 알람 같기도 하다. 제주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아, 물회 먹을 철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돔은 밤에 활동하고 낮에는 바위 틈에 숨는 야행성 어종이라 낚시로는 좀처럼 잡기 어렵다. 대신, ‘들망’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조용히 물살을 따라 어촌 마을로 들어온다.
이 시기의 자리돔은 살이 단단하고 기름져 물회로 먹기 딱 좋다. 갓 잡은 자리돔을 뼈째 썰어 된장 풀어 얼음 띄운 육수에 채소와 함께 말아내면, 그 한 그릇 안에 여름의 바다와 땅과 시간이 함께 담긴다.
자리물회는 단지 시원한 별미 그 이상이다. 식초는 단순히 새콤한 맛을 내기 위해 들어가는 게 아니다. 생선의 잔뼈를 부드럽게 하고 칼슘 흡수를 돕는 연육 작용까지 생각한, 조상의 지혜가 녹아든 구성이다.
자리돔은 물회뿐만이 아니다. 구이로도, 조림으로도, 젓갈로도 활용된다. 특히 바삭하게 구워낸 자리구이는 뼈째 씹히는 식감이 일품이고, 구수한 된장국에 조려내면 감칠맛이 은근히 배어든다.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묻어두는 자리젓은 강한 짠맛 뒤로 깊고 오래된 바다의 향을 남긴다. 따끈한 밥에 살짝 얹어 먹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을 정도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외갓집 제주에서 자리젓 비빔밥을 먹으며 등줄기에 땀이 흐르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짠맛이, 묘하게 여름 바람과 어우러져 늘 그립다.
그리고 매년 5월, 서귀포 보목포구에서는 자리돔을 위한 축제가 열린다. 이름하여 ‘보목자리돔축제’. 자리물회 한 그릇이 만 원이면 충분하고, 아이들은 맨손으로 자리돔을 잡으며 제주의 여름을 몸으로 익힌다.
바다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 행사와 병뚜껑 업사이클링 체험처럼, 자연을 생각하는 시간도 함께 마련된다. 축제의 풍경은 세대를 아우른다.
할머니가 손주의 손을 잡고, 어른은 어린이 풍물패의 북소리에 박수를 보낸다. 자리돔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고리이자, 자연과 인간의 오랜 약속이기도 하다.
제주의 여름을 제대로 맛보고 싶다면, 자리돔을 꼭 만나야 한다. 작고 흔한 듯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물회 한 그릇, 구이 한 접시, 젓갈 한 점에서 느껴지는 제주만의 깊은 여름. 올여름, 그 시원한 맛을 만나러 제주로 향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