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농부의 집념으로 빚어낸 부활의 기록
우리가 시원하게 들이키는 맥주 한 잔에는 입안을 감도는 쌉싸름한 여운과 코끝을 스치는 매혹적인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정체성을 결정짓는 주인공이 바로 '홉(Hops)'이지요.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강원도 홍천은 연간 50톤의 홉을 길러내던 국내 최대의 생산지였습니다. 하지만 수입 개방의 거센 물결 앞에 값싼 수입 홉들이 밀려들면서, 우리 땅의 홉들은 설 자리를 잃고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가끔은 너무 쉽게 잊히는 것들이 있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날이 있습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 기억 속에서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토종 홉이, 홍천의 어느 깊은 야산에서 조용히 숨 쉬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뭉클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만든 이는 홍천의 농부 연충흠 씨입니다. 그는 우연히 야산에서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오던 토종 홉의 뿌리를 발견했고, 그 작은 발견은 사라진 역사를 되살리는 위대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개인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이 불꽃은 지역 사회의 온기로 이어졌습니다. 홍천군과 대학 연구진이 머리를 맞대고 수년간 연구한 끝에, 마침내 2021년 '홍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났지요.
이제는 연충흠 씨를 포함한 아홉 농가가 힘을 합쳐 매년 3톤의 홉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적은 양일지 모르지만,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종자가 다시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을 들판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느껴집니다.
홉이 맥주에 꼭 필요한 이유는 꽃 안쪽에 맺히는 '루플린(Lupulin)'이라는 신비로운 노란색 가루 때문입니다. 이 작은 가루 안에는 맥주의 쓴맛을 결정하는 알파산과 다채로운 향기를 품은 에센셜 오일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맥주를 끓이는 과정에서 홉을 투입하면, 이 성분들이 이성질화되어 입맛을 돋우는 쓴맛으로 변하고 세상에 없던 근사한 꽃 향과 과일 향을 피워냅니다.
게다가 루플린은 잡균의 증식을 막아주는 천연 방부제 역할까지 수행하니, 맥주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수호천사인 셈이죠. 연충흠 씨는 이 루플린을 두고 "손끝에 닿는 순간 쌉쌀하고 향긋한 냄새가 퍼지며 맥주의 첫맛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그 향기를 맡고 있으면 마치 강원도 숲속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복원된 토종 홉은 국내 수제 맥주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해외에서 건너온 수입 홉에만 의존해야 했지만, 이제 우리 브루어리들은 한국의 기후와 토양, 즉 '떼루아(Terroir)'가 오롯이 담긴 로컬 맥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지요.
수확한 홉을 맥아와 함께 끓여내고 효모를 넣어 발효시키는 그 정직한 과정 끝에, 우리는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맛이 아닌 우리 곁에서 숨 쉬는 맛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는 농가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작물이 되고, 소비자에게는 이 땅의 정취를 마시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홍천을 넘어 의성과 부안, 포항으로 번져가는 이 초록빛 물결은 한국 맥주의 새로운 정체성을 빚어가고 있습니다.
한 농부의 집념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향기로운 쓴맛을 영영 잊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것이 되살아나 우리 곁에 머물 때 느껴지는 다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바쁜 일상 끝에 찾아온 오늘 저녁, 우리 땅의 향기가 듬뿍 담긴 수제 맥주 한 잔 마시며 가을의 여운을 오늘 한 번 느껴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