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멘토와 롤모델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우리 할머니. 어딘가에 기록이 된 적도, 한국은 물론, 세상을 바꿀만한 어떤 업적을 이루신 적도 없다. 하지만 내게는 그 누구보다 존경스럽고, 진취적인 여성이다.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은 아침마다 나와 동생을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맡겨 두고 출근을 했다가, 퇴근을 하면 우리를 다시 픽업해서 집으로 가셨다. 그렇다 보니 한창 내가 유치원을 다닐 시절, 눈 뜨는 동안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할머니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내게 일찍이 한글과 영어 알파벳을 가르쳤고, 클래식한 영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감성을 안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라오면서 내가 머리로 익히고, 뼈에 새기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다.
그중 몇 가지는 최근에 와서야 이해가 됐다.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던 것 같기는 하지만..
1. "친구에게는 마음을 반만 줘"
유치원 시절, 내 눈에 가장 반짝이는 친구와 나는 '단짝'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른이 되면 같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 서로 옆집 이웃이 되어 계속 같이 살자고 굳게 약속도 했다. 하도 그 친구 이야기를 많이 했어서 그랬을까, 할머니는 내게 친구에게는 항상 마음을 반 만 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바로 '싫어! 다 줄 건데??!'라고 하며 괜히 역정을 냈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을 100% 신뢰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인 만큼, 혹여나 작은 아이의 마음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저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아무리 '내 사람'이다 싶어도 내가 크게 다치지 않을 반만큼만을 내어주라는 어른의 인간관계를 그때부터 가르쳐주셨다. 아직도 내가 잘 못하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2. 떠난 버스는 쳐다보지 말자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미 떠난 버스는 쳐다보지 말자고, 또 다른 버스가 올 거라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지금도 매일 후회를 하고 있다. '할머니가 가장 후회스러운 건...' '할머니가 조금만 어렸어도...'라는 말을 언제나 입이 달고 사신다. 그래서 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지도 모른다. 손녀, 손자들을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머니에 대해 존경하는 모습 중 하나는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으신다는 거다. 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오늘도 그녀는 경제 뉴스를 읽고, 영어 공부를 한다.
3.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기자
아주 어린 나이부터 할머니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음을 알려주셨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면, 그냥 포기하고 내 팔자를 탓할 것이 아니라,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생김을 강조하셨다. 그렇기에 불평, 불만을 토해낼 시간에 즐기라는 말도 덧 붙였다. 비록 하루 종일 화장실 청소일 망정, 어차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즐겨야 한다고. 할머니 시절에는 여자가 일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남편의 수입에 의존적인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이 조금이라도 힘들어지면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가 많았다고하셨다. 하지만 할머닌 달랐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는 못 했어도, 할아버지의 공장 운영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적극적으로 일을 도왔고, 세 자매들의 육아도 홀로 해내셨다.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으나, 할머니는 피할 수 없다면 맞서 싸우고, 즐기면서 그 과정들을 해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4. 당당하자. 나는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안다
할머니가 어쩌면 스스로 가장 많이 실천하고 계시기에 내게 해줄 수 있었던 최고의 조언이지 않을까 싶다. 할머니는 굉장히 다양한 언어를 알고 계신다. 하지만, 연세가 드실수록 조금씩 언어를 알아듣는 능력 등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짐을 스스로 느끼셨다. 그런데도 외국에 나가 한 번도 주눅 든 적이 없으시다. 한창 할아버지와 같이 여행을 다니실 때는 가는 나라의 기본 언어를 미리 공부하시곤 했다. 돌아와서 얘기를 들어보면, 버스에서 만난 누군가와 랜덤 하게 대화를 하다가, 친구가 되어, 새로운 장소를 추천받는다던지, 갑자기 카페에서 옆에 앉아 있던 사람과 자연스럽게 합석을 한다던지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분명 그 언어를 다 알아듣지도 못했을 거고, 그만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도 못했을 텐데, 그런 장벽에도 할머니는 당당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할머니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내게도 언제나 말씀하셨다. 어디서도 작아지지 말고, 당당해라. 나는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안다.
5. 그러나 열심히 하자 모든 것에.
어릴 때 할머니가 너무 자주 말씀하셔서 자연스럽게 외웠던 시조가 있었다.
태산(太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 양사언의 시조
해보지도 않고, 미리 겁만 먹어서,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를 새기라는 뜻으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안될 것은 없다면서 젊음만 가지고 있다면 못할게 무엇이냐며, 언제나 도전하라고. 그렇게 꾸준한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셨다. 그전까지는 그저 글자에 불과하던 이 시조에 담긴 의미도 꽤 나이가 먹고 나서야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었다. 모든 일에 열심히인 할머니를 보고 있자면, 내가 못 할 것이 무엇이냐 싶기도 하다.
할머니는 열심히 경제 공부를 하시고, 차곡차곡 모아둔 돈으로 주식을 해서 낸 수익으로 할아버지와 여행을 다니셨었다. 그렇게 여행 일정이 잡히면, 나라에 대한 정보와 함께 그 나라의 언어가 흘러나오는 라디오며 TV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공부를 하셨고,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실 수 있었다.
손녀, 손자들이 대부분 캐나다에 있고, 오랜 이민 생활을 했던 막내 손녀들이 한국어보다 영어를 편해하다 보니 지금 보다 더 영어를 잘할 수 있도록 학원을 꾸준히 다니기도 하셨다.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병간호를 했어야 했을 때도, 그래서 할머니가 함께 아프셨을 때도, 무언가를 게을리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집에 계시면서도 텃밭을 가꾸고, 요리를 하고, 새로운 공부를 하며 하루를 보내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무엇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분명 우리 엄마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녀가 가장 따뜻했던 어머니는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게는 그 누구보다 존경스러운 롤모델이자 멘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