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은 열에 아홉은 ‘삼성’을 꼽을 것이며, 가장 유명한 기업인으로는 이건희 회장을 꼽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높은 브랜드 가치를 지닌 삼성전자를 포함해 다수의 기업을 거느린 삼성그룹은 국내 재계 서열 1위의 그룹으로, 삼성물산공사에서 점차 성장해 지금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내 최고의 재계 그룹으로 성장한 기업 집단이다. 그리고 이 삼성그룹을 진두지휘해 지금처럼 세계적인 그룹사로 성장시킨 인물이 바로 1987년 그룹 회장으로 올라서 지금까지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이다.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시절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병철 회장의 삼남으로 태어난 이건희는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니며 혼자 있던 시간이 많았던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사색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1949년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2학년 재학 중에 6.25 전쟁을 맞아 마산, 부산지역 초등학교를 거쳐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서 재학했으며, 전쟁이 끝난 1953년에 일본의 도쿄초등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다시금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던 것은 중학교 때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자퇴한 후 와세다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했으며, 이듬해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일본에서 유년기의 상당수를 보낸 영향으로 그는 일본의 발전사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건희의 고등학교 동창인 홍사덕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자주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갈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처음으로 입사한 곳은 동양방송이었다. 동양방송 이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에 삼성그룹 회장에 오르게 된다. 장남이 아니었던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회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형인 이맹희 회장과 이창희 회장이 일으킨 소위 ‘왕자의 난’ 덕분이었다. 이는 1969년 말 차남 이창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아버지를 회장 자리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투서를 올렸으며, 여기에 장남 이맹희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장남과 차남이 후계자 구도에서 탈락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유년기에는 삼성그룹을 이건희가 물려받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두 형과는 대조적으로 실무의 면에서 의욕을 보였고 또 실적까지 올리면서 이건희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삼성전자가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반도체 사업은 오일쇼크로 좋지 않은 시장상황을 고려한 삼성그룹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가 개인 사제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고 지속적으로 임원진을 설득해, 그룹 차원의 투자를 이끌어낸 것이 시작이었다.
이건희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위기’다. 반도체가 호황일 때도, 스마트폰으로 삼성전자가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도 그는 항상 위기론을 설파했다. 회장이 된 이듬해에 선언한 ‘제2창업’은 이건희의 이러한 성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일화다.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시키겠다”며 선언한 제2창업은 위기에 앞선 혁신과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잘 대변한다.
이어서 1993년의 ‘자식과 마누라 빼고는 다 바꿔라’고 임직원에게 주문한 ‘신경영’은 지금의 삼성그룹을 있게 한 가장 대표적인 선언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이건희는 사장단과 핵심간부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위와 같이 주문했으며, 이 자리에서 “삼성전자는 진행성 암에 걸려 있고,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건설은 영양실조에 당뇨병, 삼성종합화학은 애초부터 설립해서는 안 되는 회사였다”는 충격적인 경영진단을 내린 바 있다.
신경영의 시작은 56페이지 분량의 ‘경영과 디자인’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였다. 후쿠다 다미오 삼성전자 고문이 작성한 이 보고서를 기반으로 이건희는 위로부터의 적극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해 나갔다. ‘양’에서 ‘질’로의 전환을 추구한 경영혁신은 불량품이 발생할 경우 생산라인을 멈추고, 무선전화 사업부 휴대폰 불량률이 11.8%에 이르자 불량품 15만 대를 쌓아놓고 화형식을 하는 등 강도 높게 전개됐다.
신경영 체제의 정점으로 꼽히는 것은 제품의 디자인 혁신으로 이야기된다. 2002년 삼성전자에서 출시한 SGH-T100은 ‘이건희폰’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서 1,000만 대의 판매고를 올리는 큰 성공을 거뒀다. 2개였던 전 세계 1등 제품은 20개로 늘어났으며, 직원 규모는 50만 명으로 커졌다. 10년 동안 매출은 30배 증가했으며, 보고서에 기재된 10개의 전략은 모두 성공을 거뒀다. 대한민국의 대규모 기업집단이었던 삼성그룹은 초기의 선언대로 세계 일류 기업으로 올라서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됐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었으나 삼성전자의 제품은 이전까지는 ‘가성비’에 중점을 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포춘지는 2002년 삼성전자에 대해 ‘1980년대 말에 백색가전을 통해 미국 시장에 뛰어들어, 지금도 헐값에 파는 브랜드’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인식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휴대폰이었다. 2009년 세계 5위의 점유율의 삼성전자는 피처폰 대신 스마트폰에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한 이건희가 있었다.
차명계좌 적발로 인해 경영진에서 물러나 있던 이건희는 아이폰 출시로 촉발된 휴대폰 사업 위기의 시점에 경영일선으로 북귀해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모든 제품이 사라질 것’이라며 스마트폰 사업 집중을 주문하고 이를 진두지휘했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대표하는 브랜드인 ‘갤럭시S’는 그의 경영 복귀 3개월 만에 출시되었으며, 이후 연이어 출시된 고품질의 스마트폰을 통해 삼성전자는 글로벌 점유율 1위의 스마트폰 사업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도 “앞으로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며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강조하던 그가 쓰러진 것은 만찬 반년 후인 2014년 5월이었다. 급성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한 후, 위급상황을 넘기고 삼성서울병원에 이송된 이후 이건희는 줄곧 입원해 있는 상태다. 현재 삼성그룹의 경영은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상 이어받은 상태며, 이건희의 건강상태에 대해서는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건희 체제 하의 삼성그룹은 세계 일류의 기업으로 도약하고, 대한민국 전체 수출의 4분의 1을 책임질 정도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비록 철두철미하고 세세한 경영관리로 인해 삼성그룹이 회장 중심으로 책임경영이 힘든 구조가 굳어져 버린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그의 위기의식과 혁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삼성그룹은 분명 없었을 것이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이건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인이며 또 가능 유능했던 경영인으로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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