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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Genie Apr 17. 2021

[야학봉사일지]3. 자존

‘내가 이런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존재해서 참 좋다.’

 그런 감각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있으셨다면 가장 최근에는 어떤 장면에서 느끼셨는지도 궁금하네요. 저는 최근에, 정확히 말하자면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간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요.

 코티칭을 하고 있기에, 첫날 1교시는 먼저 봉사활동을 해오시던 선생님께서 할머니, 할아버지 학생들과 동시를 읽으셨습니다. 학생들이 받침이 없는 글자는 거의 익히신 것 같은데, 받침이 있으면 낯설거나 당황해서 다른 글자로 읽거나 아예 틀리게 읽어버리시더라고요. 그래서 받침의 소리부터 정확하게 짚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교시에 제가 수업을 하게 되었고, 저는 우선 칠판에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를 적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읽어보니, 예상대로 곧잘 읽으시길래 칠판에 적은 모든 글자에 받침 ‘ㅇ’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읽기 시작했죠.

“강낭당랑망방상앙장창캉탕팡항”

 학생들이 우스워 죽겠다며 까르르 웃었습니다. 더 크게 읽어보자며 몇 번을 반복해서 함께 읽었습니다.

“‘ㅇ’ 받침은 ‘응’ 소리가 나요. 제가 읽는 거 잘 들어보시면 ‘가응’ ‘나응’ ‘다응’ 이렇게 읽는 거 느껴지실 거예요. 느껴지시나요?”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이거 읽어보세요.”라고 말하고 칠판에 ‘강낭콩’을 적었습니다. 다들 바로 ‘강낭콩’이라고 잘 읽으시더라고요. 똑같은 공부 방법으로 ‘ㄴ’ 받침까지 익히고, 칠판에 짧은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강아지가 고양이랑 산수 공부를 한다. 강아지는 백 점, 고양이는 빵 점. 강아지랑 고양이 중에 누가 더 공부를 잘하나요?’

 일부러 거의 다 ‘ㅇ’, ‘ㄴ’ 받침만 있게 짧은 글을 쓴 거였기 때문에 학생들이 줄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백’과 ‘를’을 어려워하실 줄 알았는데, 운이 좋게도 ‘백 점’을 지난 한글 시간에 배우셨다고 하시더라고요.

“퀴즈!”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억양으로 “퀴즈”라고 하니 학생들 눈이 똘망똘망해졌습니다.
“강아지랑 고양이가 무슨 공부하고 있게요?”
“산수”
“강아지랑 고양이 중에 누가 더 공부 잘하게요?”
“강아지!”
“백점! 읽을 수 있고, 퀴즈도 맞췄으면 완벽하게 읽으신 거예요.”

 학생들 얼굴에 배시시 만족감이 떠올랐습니다.

“아으, 재밌다!”
순복 학생이 두 팔을 쭉 뻗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순복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많으니까 재밌으시죠?”
순복 학생이 해맑게 대답했습니다.
“네, 너무 재밌어요.”

 우리 학생들은 제가 시키지 않아도 제가 칠판에 적는 거는 모조리 받아 적습니다. 쉬는 시간이라고 말해도 자꾸만 제가 적어드린 글을 읽습니다. 9시에는 수업을 끝내려고 했는데, 학생들이 너무 열심히 해서 결국 9시 10분에 수업을 마쳤습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마무리 인사를 건넸습니다.
“선생님이 고생하셨지요. 글 모르는 사람들 가르치느라고 얼마나 힘들어요. 내일도 선생님이 와요?”
“아니요, 저는 목요일마다 와요.”
“그렇구나. 선생님이 너무 재밌게 가르쳐줘서 너무 고마워요.”

 가르치는 걸 직업으로 삼고 살아오면서, 가끔씩 동료 교사들이랑 그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걸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까.’ ‘교사 그만두고 싶어도 회사 취직하려면 우리 고졸이나 마찬가지야. 갈 데도 없어.’ ‘진짜 더러워서 못 가르치겠다.’

 다 맞는 말들입니다. 지금의 내가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보이는 순간들이고요. 그런데요, 제가 야학 수업을 끝마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분들에게 받침 ’ㄴ‘이랑 ’ㅇ‘을 재밌게 가르쳐드렸어. 그건 다 한글 가르쳐보겠다고 1년 반이나 한글 따라잡기 연수 쫓아다니고, 애기들 수업 재밌게 집중시켜보겠다고 수업 연구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거 너무 잘한 것 같아. 그리고 그 모든 과거를 지닌 상태로 이분들 앞에 서기로 결심한 나도 너무 잘한 것 같아. 내가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존재해서 너무 좋다.’

 자존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읽었었는데요. 제가 그때 선명하게 느낀 자존이라는 건, 결국 ‘내가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존재해서 너무 좋다.’였습니다. 내내 자존이라는 것에 대해 궁금했는데요, 그 궁금증이 시원하게 해결되었네요.

나누기 위해서 갔는데, 무언가 크게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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