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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Genie May 05. 2021

[야학봉사일지]5. 서로가 서로에게

 나는 때때로 불행함에 빠진다. 불행함을 촉발시키는 이유는 참으로 다양한데 가령 그 흔한 남자 친구가 없다던가, 자가가 없다던가, 시집갈 가망이 안 보인다던가, 사진이 못 생기게 나온다던가, 월급이 적다던가, 저런 학부모를 만났다던가, 이런 학생을 만났다던가, 후진하다 백미러를 부쉈다던가.


 불행함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당연히 깔고 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 공무원이라 당장 밥 굶을 걱정은 없다는 것. 크게 아픈 곳이 없다는 것. 걸을 수 있다는 것. 눈이 보인다는 것. 항상 나를 지지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어디든 갈 수 있는 차가 있다는 것. 크게 춥거나 덥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등등.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릴 것들이라 나의 불행함을 하나도 덜어줄 수 없는 것들. 그것들을 깔고 있어야,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당연한 것이라야 불행함이라는 순간의 감정에 파고들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깔고 앉아있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지각하게 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나는 더 이상 불행함이라는 감정을 만끽할 수 없게 된다. 간사하게도 나의 마음은 안도감, 다행스러움, 감사함 같은 것들의 영역으로 순간 이동하고 만다.


 서울 파견 생활을 할 때, 어릴 적 의료사고로 인해 자가호흡이 어려워진 J언니 옆에서 ‘엠브’라는 호흡 보조 기구를 호흡 속도에 맞춰 누르는 봉사활동을 했었다. 나는 지금도 불안하거나 불행하려 할 때 명상을 하며 호흡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데 그때마다 J언니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호흡을 할 수 있지.’
 그럼 더 이상 온전하게 불행하기 어려워진다. 호흡을 할 수 있으니까.


 야간학교 학생들을 만나면서는 글을 읽고 쓰는 것뿐만 아니라 나무나 물고기처럼 아주 간단한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내가 받아온 교육의 수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교육의 산물이라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내 나름대로 간단히 도식화하여 그리는 나의 고유 능력이라고만 생각했다. 주제넘은 생각이었다. 내가 만난 선생님들, 글을 읽을 수 있어 누릴 수 있었던 그림책이나 동화책들, TV를 볼 수 있어 접했던 화면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그릴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어. 그리고 그릴 수도 있어.’
 불행하려 할 때, 나의 학생들이 떠오른다면 온전하게 불행하긴 어려울 거다.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니까. 그릴 수도 있으니까.


 타인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보며 나의 누림을 감사하게 되는 것을 ‘가난한 감사’라 표현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누군가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여 그제야 자신의 누림을 안도하게 되는 것. 후지긴 후지다. 그 구절을 읽은 뒤로는 가난한 감사를 느낄 때마다 스스로를 후지게 바라보며 자책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방법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의식조차 못할 정도로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가다가, 그것을 낯설게 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아, 나는 이거 있었구나.’라고 자동적으로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지금의 내가 내린 결론은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은 부러워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부분은 가난한 감사를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동정을 받을 이도 없고, 일방적으로 우월하기만 한 이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씩은 잘났고 조금씩은 후진 고만고만한 인간들일뿐.

 J언니와 보낸 시간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면 다들 미간부터 깊이 찡그린 채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이야기를 경청하는데, 거기엔 ‘그 불쌍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들어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나는 어떤 부분에서 J언니를 부러워했다. J언니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냈는데 종교 서적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나는 내내 책을 내보고 싶었으니까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가 나기도 했다. 또 J언니 주변에는 J언니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자매가 항상 함께 있었다. 교회 청년부 학생들도 항상 언니를 비췄다. 당시 관계의 공허함에 외로워하던 나는 J언니가 부러웠다. 언니는 한순간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으니까.


 언니는 내가 여행 이야기를 하면 동화책 듣는 어린아이의 표정을 하고 경청했다. 언니는 나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했을 테다. 나는 언니 이름으로 된 책과 언니를 둘러싼 사랑을 부러워했고.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고,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며 그렇게 더 나을 것도 더 초라할 것도 없는 두 사람은 가끔 만나 수다를 떨었을 뿐이다.


 우리 학생들은 한글을 읽지 못한다. 그림도 그리지 못한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이제 다닌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두 시간 반씩, 산수 공부도 하고 한글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린다. 그들에겐 배움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 있다.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웃기도 하고, 받아쓰기 망쳐서 짜증을 내기도 한다. 배울 곳이 있고, 선생님이 있고, 같은 반 친구들이 있다. 나는 학생인 그들이 퍽 신나 보이고, 배우며 살기를 선택한 그들이 멋져 보인다. 나는 어떤 부분에서 그들을 동경하고 따라 하고 싶어 한다.


 나는 선생이고 그들은 학생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동경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같이 읽고 쓰고 그린다. 아니다, 그들은 나를 동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 내가 주제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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