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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Genie Jan 25. 2024

큰 개랑 나 뿐인 설산

큰 개랑 삽니다

"눈이 와야 할텐데."


 올 겨울은 유독 비가 잦았다. 조금만 더 추웠어도 눈이었을텐데, 매번 아쉬웠다.


 캐나다의 피가 흐르는 우리 집 큰 개는 추우면 꼬리가 올라가고, 눈이라도 쌓이면 좋아서 바닥을 뒹군다. 온 몸에 눈을 흠뻑 묻히며 몇 미터는 기어가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일어선다. 우리 집 큰 개가 좋아하니까 나도 눈을 기다린다.


 간밤에 눈이 내렸고, 일어나자마자 큰 개의 목줄을 채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우리만의 땅을 찾아 산기슭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큰 개는 꼬리를 추켜세우고 웰시코기같은 엉덩이를 흔들며 앞장섰다. 나뭇가지도 헤치고 비탈길도 기어오르며 더 깊게, 더 멀리 겨울산을 걷는다.


 가끔 고라니 발자국이나 나있는 산기슭으로 들어가면, 온천지 우리만의 설산이 펼쳐진다. 포근히 쌓인 눈과 날리는 마른 잎과 고요히 흐르는 구름. 이 세상에 너랑 나만 있는건가.

 

 시린 손을 비벼가며 열심히 공을 던진다. 큰 개는 토끼처럼 폴짝폴짝 공을 찾아 나선다. '고 놈 참 개코네.'의 그 개코를 가지고 있는 큰 개는 공 냄새가 가까워지면 꼬리를 마구 흔든다. 킁킁킁킁 바닥에 코를 박고 몇 번 왔다갔다하면 딱 거기에 공이 쏙 박혀있다. '전기 같은 게 없어지면 너가 나보단 오래 살아남겠구나.' 생각한다.


 큰 개는 네 발이라 산기슭 걷기에 용이한데 나는 두 발이라 자꾸 흔들리다 넘어진다. 엉덩방아를 찧을 땐 일부러 우는 소리를 내본다. 앞장서던 큰 개는 헐레벌떡 다가와 나의 안위를 살핀다. 큰 개를 속인 게 재밌어서 큭큭 웃으면 큰 개는 나를 찌릿 노려본다.

 

 공을 던지고, 우는 척하고, 손 시려워 하다보면 큰 개도 지친다. 그럼 상념에 잠긴 사람마냥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이가 없달까, 그런 기분이 든다.

무슨 생각하니?

 큰 개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다가 앞으로 다가선다. 휴식 중인 큰 개에게 "오로로로롤" 소리를 내니 활짝 웃는다. 눈도 감으며 사람처럼 웃는 큰 개를 연신 찍어본다. 크게 웃는 입을 따라 내 입꼬리도 올라간다.

뭐가 그렇게 웃겨?

 큰 개가 지친 틈에, 나무도 하늘도 구름도 둘러본다. 겨울 하늘이 이렇게나 맑았던가. 나무에 쌓인 눈 꽃이 이만큼 하얬던가, 눈 밟는 소리가 이토록 선명했던가.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좋았다. 하나도 외롭지 않은 우리 둘 만의 설산이다.


 추운 건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눈 밟는 소리와 함께 이 산 저 산 기어다니게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나. 귀마개 달린 털모자 쓰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닐 줄 알았나. 어느 날 불쑥 나타난 큰 개가 나의 일상을 넓혀 새로이 한다. 원하지 않았지만 싫지 않은 방향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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