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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Genie Aug 20. 2024

어른이 된 나의 제자들,

 오랜 제자에게 연락이 왔다.


"저도 이제 으-른입니다. 저희 어른되면 술 한잔 사주신다고 하셨던 거 기억하시나요?"


 시간과 장소를 알려달라 하니 저녁 6시 번화가 호프집에서 만나잔다. 13살 꼬맹이들이 이제 술집에서 선생님을 다 부르네 싶어 꿀밤을 콩 먹이고 싶기도, 기특해서 꽉 안아주고 싶기도 했다.     


 아이들을 만나기 며칠 전부터 어떻게 오랜만의 만남을 기념할까 고민했다. 책을 선물할까 싶기도 했지만, 원하지 않는 책을 들이미는 선생님 같은 행동은 그만하고 싶었다. 대신 먼저 어른이 된 사람으로서 이제 어른이 된 아이들에게 어른 축하금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너희가 먹고 싶은 걸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렴. 그게 어른이지. 어른이 된 걸 축하해.’     


 나의 마음을 만 원짜리 몇 장과 함께 봉투에 담았다. 공백의 응원, 격려, 용기. 그리고, 한 명 한 명의 열세 살을 떠올리며 짧은 편지를 썼다. 열세 살의 네가 나를 어떤 방식으로 웃겼는지, 위로했는지 적었다. 이름이 기억 안 나면 어쩌나 했는데 여러 해를 지나쳐 내 앞에 그때 우리의 교실이 펼쳐지는 듯 생생했다. 기적 같았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 얼른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과 아이들 앞에 서고 싶지 않은 마음이 팽팽히 줄을 당겼다. 그때에 비해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내가, 훌륭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내가 너희들 앞에 서려니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호프집 조명은 산만했고, 나는 나의 아이들을 찾았다. 호프집 가운데 테이블에 덩치만 컸지 13살 얼굴 그대로인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반가워서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체통을 지키려고 발가락에 힘을 줬다.     


 한 명 한 명 근황을 들었다. 대학을 갔고, 반수를 하고, 입대를 앞뒀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했다. 나는 완전히 편파적인 마음으로 너네의 선택이 다 옳았다고 너네가 짱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하나의 근황마다 맥주 한 모금 씩, 여름 맥주가 이 갈리게 시원해서 머리가 다 아득했다.


 공백의 응원을 하고 싶었기에 어떠한 조언도 하고 싶지 않았다. 좁은 내 식견에서 말이 튀어나올라 하면 맥주를 얼른 삼켰다.      


‘너네가 다 알아서 잘할 거야, 너희가 어떤 애들인데, 13살부터도 그렇게 착하고 멋진 아이들이었는데. 내가 지금도 너희 옆에 있다면 맨날 맨날 쫓아다니면서 말해줄 거야. 너희는 13살인데도 나를 일으켰다니까.’ 이 말이면 충분했다.     


 이 아이들 담임할 때, 그때도 나는 어른이었지만 내가 선 자리, 나를 둘러싼 상황들에 휩싸여 울기 직전의 어린아이 마음이곤 했다. 출근도 하기 전에 지쳤고, 퇴근도 하기 전에 울고 싶었다. 이런 나를 13살 꼬맹이들이 어떻게 알아챈 건지, 이 꼬맹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든든한 아군 같은 걸 했다. 나를 자꾸 웃기고, 나를 자주 뿌듯하게 하고, 내가 훌륭한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만들었다. 한 순간도 외롭지 말라 했다.      


 아이들은 자꾸만 내가 얼마나 착한 선생님이었는지 말했고, 나는 ”아니야, 내가 착한 게 아니라 너네가 진짜 좋은 애들이었다니까." 반박했다. 어쩌다 분위기가 과열될라 하면 시원하게 짠을 외치며 함박 웃었다.      


 우리는 인생 네 컷을 찍었다. 좁은 방에 옹기종기 붙어 여러 표정을 지었다. 온통 나만 가리키는 사진도 찍었다. 수줍었지만, "내가 얘네 담임이에요." 자랑하는 것 같아 기분 좋기도 했다. 여전히 유치한 나는 아이들 앞에서 먼저 어른인 척하느라 힘들었다. 얘네랑 몇 년 후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그냥 같이 어른하자고 말할 것 같다.      


"너네 ‘철은 너무 무거워. 들기 싫어요,’ 노래 들어봤니?"     


 여전히 교사라는 직업을 싫어한다. 너무 버겁고, 어렵다. 나의 내일도 모르겠는데, 아이들의 10년 후를 예상하며 진로교육하는 것도 어렵고, 해야 할 일 다 미루고 롤이나 4판 조졌는데, 아이들에게 꾸준함과 성실함에 대해 말하는 것도 속 간지럽다. 우리 언니도 담배 피우는 데, 금연교육하는 것도 싫고.     


 그래도 제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새로 한 결심은 있다.

‘내가 교사를 하는 동안에 감사하게도 나의 제자가 되어준 아이들에게, 10년 후 20년 후에 다시 만나도 반갑기만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겠다. 그 해의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생님이 되어주자.’ 결심했다.      


 나의 아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자꾸 일으킨다. 내가 신세를 많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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