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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5. 2022

비정상 사회에서 정상이길 거부하기

이분법적 규범에서 다양성과 고유성으로 

홍칼리라는 사람의 글을 읽었다. 아파야 정상일법한 사회에서 병들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한국 사회에서 강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어딘가 어긋난 전형의 틀에서 의문과 균열 속에 혼란을 경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두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외치는 것들에 '왜'라는 의문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정말 끝도 없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 정상이 무엇이냐, 당연한 게 어디 있느냐고 위화감을 느끼는 순간 모든 게 정신 나간 사기극으로 보인다. 


정상성의 병리성.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를 읽으며 나는 그 문장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나만 느끼는 게 아니구나. 


한국은 사회가 규정해 놓은 질서가 너무나도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인데, 그 질서마저 납득이 잘 가지 않는 곳이다. 동양 국가임에도 서양의 기계화되고, 이분법적인 대립의 철학을 스펀지처럼 착착 빨아들인 탓일까. 모든 것이 양과 음, 흑과 백, 0과 1, 정상과 비정상으로 범주화되어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괜히 있는 나라가 아니다. 문제는 모와 도에 들어갈 수 있는 범위조차 너무나도 좁고 제한적인 데다 한쪽이 우월하고 한쪽은 열등하다는 인식 역시 너무나도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모두가 그 우월한 한쪽에 들어가기 위해 미친 듯이 용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둘로 나뉠 수 없다. 0과 1, 흑과 백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0과 1 사이의 수많은 소수들, 흑과 백 사이의 서로 다른 농담으로 존재하는 회색들. 우리는 이런 애매하고 모호한 영역 안에 위치한다. 따라서 사람을 둘로 나누고, 어느 한쪽이 우월하며 나머지 한쪽은 열등한 상태라고 규정하는 것. 어느 한쪽은 정상이고 어느 한쪽은 비정상인 상태로 규정하는 것은 필히 많은 사람의 불행을 초래한다. 그 누구도 0과 1처럼 명확한 영역에 속할 수 없다.


일례로 나는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또한 평생을 저체중으로 살아왔으며, 얼마 전 건강 검진에서는 저혈압 판정을 받았다. 사회에서 말하는 완벽한 정상적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나만 이런 것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소수성을 가지고 태어나거나 혹은 살아간다.


우리는 평균과 정상을 자주 혼동한다. 모든 인간이 평균에 들어갈 때 정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균에 속할 때 유리한 사회에서 기득권을 잡은 평균치의 인간들이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뿐이다. 모든 지배적인 지식은 지배하는 자의 지식이고, 모든 언어는 해석하는 자의 권력이 작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이 가진 고유한 소수성은 지워지고 다수에 속하는 속성만이 강조된다. FFFFFF와 000000이 존재하기 위해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숫자와 알파벳들은 사멸한다. 사멸당한다. 사이 값은 희미해지고 이분법은 당연해진다. 정확히는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지배적인 쪽이 당연해진다. 



애초에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 정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걸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인간이 만들어 낸 기준 중에 영원불변의 진리는 없다. 특정한 범주에 사람들을 밀어 넣고 구분 짓는 기준은 지구가 돌고, 태양이 뜨고, 생명은 죽고, 물은 순환한다는 자연계의 법칙처럼 인간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상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전, 우리의 동의 없이 과거의 인간들이 만들어 낸 약속이다. 과거의 인간들 중에서도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권력을 가진 인간들의 착각일 뿐이다. 내가 우월하고 너는 열등하다는 착각. 내가 가진 속성이 올바르고 네가 가진 속성은 틀렸다는 오만. 그 속에서 비롯되는 것은 편견과 차별, 혐오와 배제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규범은 기존의 강자를 강자로, 약자를 약자로 만드는 과거의 낙인에 불과하다. 






병원에서 저혈압 진단을 받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내 건강 상태가 이대로 괜찮은 건가?'였고, 하나는 '육식이 당연하고 만연하게 자리 잡은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혈관이 막혀있는 수치가 정상으로 판정되기 때문에 채식을 하는 내 수치가 비교적 낮아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건강 검진 혈압 수치마저 의심하는 건 또라이나 할 법한 생각이라고 자조하다가도, 앞으로도 이렇게 또라이처럼 살아야지, 하고 일상에서 자주 다짐한다. 앞으로도 나는 급진적이고 당당한 또라이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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