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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7. 2022

대전환의 시작

당연하다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다

삶의 모습이 한 번 크게 바뀌었다.




여유롭게 일어나서 하루종일 누워 게임하고, 그림 그리고 팬픽 쓰며 살다가 문득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렇게 편입 준비를 시작했고, 일 년 간의 편입 공부와 편입 시험이 끝난 뒤에도 미친듯이 자기계발을 했다. 한 번 만들어놓은 루틴이 깨질까 봐 두려워서였다.


올 해 2월 한 달 동안 정말 끊임없이 공부하고 매일같이 운동도 하고 강의도 듣고 억만장자 동기부여 영상도 보고 투자도 알아보며 돈 벌 궁리도 하고 알바도 다녔다. 정말 인생에서 그렇게 열심히 산 적이 없었는데. 아이러니하게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단지 30분 낮잠을 잤다는 이유로 나태한 인간이 된 것만 같았고, 스스로에게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 매일을 보냈다. 가장 치열하게 살면서 가장 불행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나를 용서할 수 없는 지경이어도 성장, 발전, 성공을 위해서는 이렇게 사는게 맞다고 믿었다. 하루 종일 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때보다 지금이 더 나은 모습이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세뇌시켰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전처럼 돌아갈까봐 두려웠다.


게으른 나는 혐생이고 지금의 내가 더 나아진 거라고, 이게 갓생이라고 계속해서 나에게 되뇌었다.


분명히 정신적으로는 이전의 내가 훨씬 건강하고 행복했으며, 오히려 스스로를 더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거의 나를 한심한 사람 취급하며 자기혐오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이 영상을 보게 되었다.  


https://youtu.be/DvF0MJIlYzA


 한국에서 그렇게 강조되고 반복되는 자기계발이 사실은 자기 착취라는 전혀 새로운 관점의 썸네일을 발견했다.


하루종일 자기계발 신화에 빠져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자연스럽게 영상에 손이 갔다. 어제보다 나아진 내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음에도 전혀 행복하지 못하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의 골자는, 한국인들은 스스로의 내면에 노예 감독관을 심어놓고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거였다.


자기계발이 좋은 것이라고만 말하는 사회, 매년 새해가 시작되면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서점 매대를 가득 채우는 국가에 살면서 나 역시도 그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자기 관리와 자기계발은 좋은 것이고, 부지런함은 미덕이며 게으름은 악덕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게으르다고 평가하는 과거의 나는 분명 행복하고 평온했지만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가 끝났다"는 죄의식에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급기야 올해 2월의 나는 잠깐의 휴식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말은 다 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사실은 잘못되었으며, 자기계발이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이었고, 여기서부터 내가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 수많은 동기부여 영상과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어쩌고들이 심어놓은 도그마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영상을 본 뒤로 내 안에서 무언가 균열이 일어나는 듯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가 어제보다 나은 나, 어제보다 통제된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외치며 스스로를 통제하면 통제할수록 박수를 받는 세상에서 이런 일들이 사실은 자기를 노예로 만들고 착취하는 일이었다는 관점은 가히 새로웠다.


나도 한국 사회에 대해 한 비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짧은 클립 안에 내가 몰랐던 통찰이 들어있었다. 이런 사회 안에 속한 구성원으로서는 아무리 무엇이 잘못된 건지 해체하려 해봐도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큼의 통찰을 가지지는 못했던 거다.


한 번 클립을 시청하고 나니 다른 클립들도 알고리즘에 올라왔다. 알고리즘에 뜨는 족족 모두 시청했다.






https://youtu.be/dYpRjUeGvLQ

당시 시청했던 영상. 한국인이라면 꼭 봤으면 좋겠다.


모든 영상을 볼 때마다 내 안에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당연함들에 조금씩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소비와 생태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68혁명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모든 억압에 대한 해방을 시도한 전세계사적 사건이라는데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저렇게 다양한 억압을 상상해 낼 수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왜 꼭 돈을 벌어야 하지? 이조차도 억압이라는 것이다.



사실 내가 흔히들 말하는 그런 성공을 위해 매일 억만장자들의 동기부여 영상을 보고, 눈부시고 화려한 커리어를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계발서를 읽어댔던 이유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억압 때문이었다. 나의 수많은 정체성 중 하나인 여성이라는 특성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지 않기를 원했고, 내 몸에 대해서보다 내 능력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었다. 후대의 여성들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랐고, 그 롤모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 하에 시작했던 일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아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brunch.co.kr/@dailyphilosophy/2






그러니까 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자본의 축적으로 내 힘을 키워야겠다고 눈을 돌렸었다. 이게 나를 자유롭게 해줄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전혀 자유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자유라는 가치를 찾고 싶었는데 도리어 자유가 위협받는 기분이었다. 동기부여 영상 속 하루종일 자본과 노동의 굴레에 갇혀 살더라도 워라밸을 외칠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으며 언제까지 그 굴레에 갇혀 살아야 하는지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인플레는 계속될 것이고, 돈은 아무리 모아도 부족할 터였다. 경제적 자유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의 노예가 되어야만 했다. 열심히 그들의 말을 받아적으면서도 그런 삶이 막연하게 공포로 작동했다. 노동으로 인해 내 삶과 주변환경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내 건강과 삶을 망치게 될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 생각해도 노동에 저당잡혀 내 몸과 삶을 돌볼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자유로의 지평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막막함을 느꼈던 가장 큰 순간은 인생의 로드맵을 작성하면서였다.


유튜브 영상 속 상위 1%의 부를 축적한 소위 "구루"들은 미래를 크게 그리라고 말했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무언가를 성취하라 외쳤다. 그들의 말대로 인생에서 5년 단위로 이루고 싶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35세에 이만큼을 벌고, 40세에 이만큼을 이루고, 50세에는 이런걸 달성하고... 어느정도 적어내려 가다가 그 이상이 보이지 않아 더이상 적을 수가 없었다. 물질적 성공을 생각하니 환갑에 무엇을 이룰 것인지 그려지지가 않았다. 기껏해야 생각나는 것들은 서핑하기, 리조트 짓고 해변가에서 모히또 마시기 따위였다.


정말 이만큼의 부를 얻고, 리조트를 지어서 해변가에서 모히또를 마시는 삶을 산다면 나는 행복할까? 눈을 감고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을 전부 달성한 뒤의 내 삶을 떠올려봤다. 그런데 막상 느껴지는 건 허무함이었다. 지금 가지고 싶은 것들을 모두 손에 쥐고도 그 다음이 없다는 공허함만 남겠구나. 결국 내 손에 탐욕스럽게 들고 있어봤자 나와 함께 흙속에 묻혀버릴 것들이었다. 잠깐의 쾌락만 선사할 뿐 근본적인 자유와 행복을 안겨주지는 못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 다시 찾은 성공한 사람들의 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말고 타인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내 손에 남기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이 또한 곧 허무함이 찾아왔다. 어차피 환원할 거, 왜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야 하는 걸까.


소비하기 위해서든,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서든 세상에 있는 돈을 내 손 안에 싹싹 긁어모으려는 생각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떤 이유에서건 허무함만 남고, 동력이 되어주진 못했다. 그때부터 자본 축적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무언가 회의감이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자연의 해방, 소비와 생태적 상상력의 연관성, 자본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에 대한 담론을 듣게 된 것은 아마 필연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돈을 벌고 돈을 쓰는 것이 의미하는 것. 소비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마침 채식을 실천중이던 참이었고, 작년부터 식품업계의 자극적인 음식 생산과 판매에 대해 자본과 기업의 이윤 아래 나라는 개인의 건강이 위협받는다고 느꼈던 터라 이들간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TlqJwJpIWo

김누리 교수님의 사회 비판과 통찰이 가장 잘 녹아있는 영상.

포스트 코로나시대에는 캐피탈리즘대신 라이피즘으로 가야한다고 말하는 영상. 김누리 교수님이 나와서 강연하신 영상들을 다양하게 시청했다. 그 중 김누리 교수님의 다각적 통찰이 고루 잘 녹아있는 요약본이라고 생각해 이 영상을 가져왔다.



조금씩 내 안에서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공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자본주의적 세계관은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했다. 대신 그 균열 사이로 고개를 내밀던 회의감과 의구심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상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으며,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말. 삶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말. 미국은 글로벌 스탠다드가 아니라는 말. 이런 것들이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에 힘을 실어주었다. 여기서 또다시 느꼈다. 내가 따라가야 할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 미국식이었고, 세계의 부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도 웬만해선 미국인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미국을 이상으로 그리고 있었음을 깨달았으며, 사실은 전혀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체제가 얼마나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체제인지도 실감하게 되었다.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은 불평등의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불평등한 구조 자체를 갈아 엎는 것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인간들이 만들어낸 화폐가치라는 허구, 허구적 교환가치보다 하찮게 여겨지는 실존들의 생명, 삶, 권리와 존엄성. 지구에 있는 자연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으며 실재하는 물질들이다. 동물의 생명과 인간의 기본권은 실존하는 가치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들을 전부 돈이 되는지 안되는지, 상업성 여부만을 따지면서 불필요한 것과 필요한 것으로 나누고, 불필요하다 여기는 것들은 가차없이 처분해버린다. 언제부터 인간들이 필요하에 만들어낸 허구적 약속이, 지구상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실존보다, 존재들보다 중요시되기 시작한 거지? 생명을 왜 화폐가치로 환산해서 사고 팔고있는 거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왜 모든 판단의 기준, 그 맨 꼭대기에 자본이 개입되고 있는 것인가. 어쩌다 자본이 만물을 지배하게 된 것인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지켜야 한다.


그런 마음이 들자 돈이라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정말 중요한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자본의 증식과 소유의 축적이 경제적 자유인게 아니라, 그냥 자본의 개입과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의 방식이 진정한 경제적 자유인 것은 아닐까? 소유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실마리를 제공한 건 게임이었다. RPG 게임 속 주인공으로 보통 그려지는 여행자의 삶이 진짜 자유로운 삶처럼 느껴졌다. 현질을 해서 옷을 사고 무기를 강화하는 것은 또 다른 얘기긴 하지만 적어도 그 게임 안에서 내 캐릭터는 돈(캐시가 아니라 게임 세계관 속 화폐)이 없어서 무언가를 못했던 경험은 없었다. 기본적인 것들은 전부 할 수 있었다. 포션처럼 먹거리를 얻는 일이나 기본 장비와 같은 아이템을 얻는 일을 못하지 않았다. 타인을 도와준 대가로 아이템을 얻거나, 장비를 직접 제련하거나 필드에서 먹을 것을 얻는 식으로 자급자족 할 수 있었다.


무언가에 얽매여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떠날 수도 있었다. 게임 속 경제활동을 떠올리니 거기에 답이 있는 듯해보였다. 이러한 시스템이 실제 삶에도 적용되게 만든다면 충분히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허황된 이상주의자의 망상같아 보여도 그게 자유로의 지평같아 보였다. 자본의 압력이 개입하지 않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나는 곧 그 가능성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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