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Jun 13. 2022

가짜 풍요 속에서 살아남기

없어도, 적어도 괜찮은 삶

요즘은 화폐와 기술 문명 없이도 살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여러 가지 기획 중에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계와 자본, 물질에 예속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술과 전문가들은 내 신체와 나의 경험적 지식을 불구로 만들고, 소비자라는 위치는 내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들에 대한 원리를 전혀 모르도록 만들었다. 무언가가 필요하면 구매를 해야만 하고, 기업의 계획적 구식화 아래 구매의 주기는 점점 더 짧아져 간다.


지금처럼 스태그플레이션이라도 발생하면 들어오는 돈은 없고 나가는 돈만 늘어간다. 몸값은 밥값 아래 초라해진다. 입에 넣을 것 하나 자급하지 못하는 삶은 식량 수급이 불안정해지는 상황 앞에 한없이 취약해진다. 더 쓰기 위해 더 노동하고, 더 노동하기 위해 더 돈을 써야 한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서비스가 되고, 돈이 오가야만 하는 전 지구적 산업 문명에 편입된 구성원은 임금 노동과 소비의 굴레에 저당 잡혀 살아야 한다.


나는 그런 삶이 싫어서 저항하기로 했다. 더 많고 더 편리하고 더 화려한 삶은 결코 나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화폐가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인류는 꽤나 오랜 시간 화폐 없이도 잘 살아왔다. 더군다나 인류사에서 화폐가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한 건 더더욱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화폐 없는 삶을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다.


설령 인류가 필요해서 화폐를 만들었다 할지언정 그것이 도리어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우리를 구속시킨다면, 우리는 과감히 폐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게 정말로 필요해서 생겨났다고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인류에게 고층아파트가 꼭 필요했을까? 샴푸 린스 바디워시 로션이 꼭 필요했을까? 엘리베이터와 고속 인터넷이 꼭 필요했을까?

생각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



인류사가 인류를 위하는 방향으로, 좋은 쪽으로 발전해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 과정들이 꼭 필요에 의해 벌어졌으며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도 할 수 없다. 오히려 불평등, 전쟁, 폭력, 기후 위기, 영양 불균형, 식민화, 신체 퇴화, 노동 시간 증가, 문화적 가난 등의 현상이 일어났고, 급기야는 금세기 내에 멸종하게 될 위험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역사를 인류의 위대한 발전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착각이다. 기술이 주는 풍요와 문명의 이기, 혜택 아래 살고 있는 것 같아도 우리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실업 문제를 떠안게 되었고, 과잉 생산으로 인해 과거보다 더 오랜 시간 임금 노동을 하게 되었으며, 현대인의 삶은 5G와 같은 속도로 흘러가느라 숨 가쁠 정도로 여유를 잃었고, 인터넷과 SNS로 전 세계와 연결되는 대신 가까운 이웃과의 연결과 유대, 공동체는 단절되었다. 전 세계와 연결되면서 우리는 오히려 모니터 속 연출된 희극과 내 인생의 비극을 비교하며 사서 불행해지는 상황에 처했다.






근대 이후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는 데카르트-칸트-베이컨의 기계론적 세계관, 계몽주의 인본주의 패러다임으로 인해 불행은 가속화되었고 삶의 질은 좋아지지도 못했다. 이 세계관으로 인해 다양성은 위계질서 아래 서열화되었고, 차이는 차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인간 이성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으로 지구가 46억 년 동안 실험해 갖춰 놓은 조화들은 깨지게 되었다. 공짜 진보는 없다. 우리 사회는 그 대가를 고스란히 돌려받게 되었다. 기술과 문명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부작용으로 새로운 문제들을 양산하기까지 한다.


애초에 과학기술은 전쟁과 국익, 자본주의를 위해서 탄생했지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탄생하지 않았다. 디지털 산업문명은 자유 대신 감시와 통제를 낳았다. 디지털 문명 아래 우리는 스스로를 감시하는 감시자가 되었고, 구독자라는 이름의 감시자들에게 스스로를 맡기게 되었고, 빅 테크나 여러 기업들에게 빅데이터 제공이라는 명목으로 소비, 방문 기록, 검색 기록, 관심사 등을 하나하나 투명하게 감시당하게 되었다. 인간은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는 자본 독재 아래 기술 전체주의의 삶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런 삶을 가속화시키는 과정에서 생태계 파괴, 인간의 자연적 조건 파괴,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 파괴, 인간성의 말살, 인간과 인간의 관계 파괴, 호모 사피엔스 종의 생물학적 특성에 적합하지 않은 현대적 삶의 양식 형성 등 여러 부작용 속에 허덕이게 되었다.



인류사가 진보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에게 좋은 쪽으로 작용해왔고,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학명과 달리 그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지금처럼 물질만능주의, 무한 경제성장 주의로 끊임없이 지구를 착취하며 살다가는 기후 재앙으로 자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애먼 동물들까지 붙잡고 물귀신처럼 공멸하는 꼴이다.


국부 수술적 해결 방식에 불과한 기술만능주의는 오히려 문제를 가중시킨다. 자연과 사회는 모두 연결되어있는데, 어느 한 곳만 뜯어고치려고 하는 태도는 유기체적 연결의 흐름을 끊어내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당장은 해결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연과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하면 고쳐진다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기술로 인간의 몸을 점철시켜 증강하고 개선하겠다는 태도는 신형 나치즘이나 다름없다. 인간 개개인이 가지는 특성들을 한계로 상정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 개선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는 관점 자체가 우생학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개성과 차이, 다양성, 자연적인 변화의 흐름으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인간 증강이나 노화 역행 따위의 말을 할 수가 없다. 젊음은 우월하고 노화는 열등하다. 연약한 인간 신체는 열등하며 탄소섬유로 점철된 기계 신체는 우월하다. 장애는 극복되어야 하고, 한계는 뛰어넘어야 한다. 생명공학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러하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원리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학살하고 멸종시키는 기차 위에 올라탄 셈이다.



젊음과 노년이라는 생애주기는 그저 사계절과 같은 변화의 흐름이다. 변화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존재한다.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느끼는 것들, 인간성이라고 말하는 특성들은 인간이 연약하게 태어나 오랜 시간 돌봄을 필요로 하고, 협력해야 하기에 생겨난 특성들이다.


모든 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소중해진다. 시간이 무한하지 않기에 우리는 하루를 더 소중하게 보낼 수 있고, 주어지는 것들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 선택에 더 신중할 수 있고, 찰나의 순간에도 의미를 담아 간직할 수 있다. 생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은 더욱 특별해진다.

유한한 기억은 각별하고 유의미한 순간만을 담아놓은 영화가 된다.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들을 지켜내기 위해 근대와 발전, 개발과 진보라는 허울 위에 세워진 멸종행 열차에서 하차하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대전환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