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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16. 2022

내가 자연식을 계속하는 이유

채식 6개월 차, 느낀 것들

처음 내가 채식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단순했다. 더 이상 육류가 맛있지 않았고, 채소만이 주는 싱그럽고 신선한 맛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최근 눈에 띄게 증가한 비건 트렌드도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에 한몫했으나 결정적인 시작 요인은 입맛의 변화,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였다.


지금도 물론 건강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고, 자연식을 하면 절대 현대 문명형 만성 질환에 시달리진 않을 수 있겠다는 자신은 있으나 그걸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조금 달라졌다.








소비 욕구로부터의 해방

오늘날 우리 식탁에 오르는 것들은 "과잉"의 문제를 안고 있다. 더 이상 식사는 감사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당연한 것을 넘어 과잉을 추구한다. 무한리필 고기 뷔페나, 돈이 아까워서 혹은 양이 많아서 은연중에 과식하게 되는 외식 문화. 영양가는 점점 떨어지고 있으면서 오로지 쾌락에 목적을 두고 있는 저질 배달음식, 가공 식품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한 아름 쌓아놓고 탐하며 소비를 조장하는 먹방 또한 탐욕과 욕망의 과잉이 식욕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넌 먹을 때가 제일 예뻐 같은 문구들 역시 식탐과 소비를 연결 지어 자제력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체의 필수 활동에서 오락으로 변질된 식사는 한순간의 쾌락에 지출된 카드 값, 미래의 의료비만을 청구할 뿐이다.


음식은 시청자의 입맛을 돋우도록 자극적으로 촬영되어 내보내지고, 먹는 양 또한 지나치다 싶은 수준인 먹방은 가히 포르노적이다. 푸드 포르노로 소비자의 시각을 자극하려는 시도들의 향연이 계속될 때, 거기에 나오는 음식들은 주로 고도로 가공되었거나 자극적인 양념으로 버무려진 것, 동물성 식품이다.


그러나 가공을 최소화하고, 조리를 단순히 하고, 식물성 재료들을 기반으로 한 자연식을 하다 보면 자연히 저런 것들과 멀어지게 된다. 내가 먹을 수 없는 것, 먹지 않는 것들이 방송으로 한없이 내보내지는 걸 보면서 점점 그 자극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배민과 요기요, 명륜 진사 갈비로 요약되는 무한 탐닉과 무한 쾌락추구. 식욕으로 대표되는 소비 욕망.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나니 물질에 대한 욕심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자본의 축적에 대한 회의감, 자연이 낳은 것들이 돈이라는 허구적 가치로 계산되어 어떤 것은 버려지고 어떤 것은 상품이 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채식을 하며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밖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에 제한이 생기면서 안심할 수 있는 재료로 직접 만들어 먹다 보니 수동적으로 음식을 소비하던 소비자에서 능동적으로 식사를 꾸리는 요리사가 되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니 소비 행위와 돈에서 상당 부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육식과 가부장제

육식은 남성 중심 주의적 식문화다. 물론 동물성 식품을 섭취한다는 그 자체가 가부장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원주민들이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최소한을 사냥한다거나,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동토에서 바다표범을 사냥한다거나 하는 것까지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한 사례다.


그러나 오늘날 행해지는 육식은 성정치적 면모를 포함한다. 남자라면 힘을 써야지, 라며 동물성 단백질을 추종하는 것을 예로 들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고생했으니 고기 먹어", "성과가 좋으니 오늘 회식은 소고기다" 같은 말에서도 가부장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고생했으니 고기를 먹으라는 말은, 나의 고생과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타자의 희생을 착취하겠다는  말과도 같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 아닌가?

"나 열심히 살았으니 여자 주세요", "나 열심히 살았는데 이 정도면 여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등을 외쳐대는 남성들의 논리와 같지 않은가?


왜 남이 고생한 것을 애꿎은 소나 돼지들이 보상해주어야 하는가? 왜 누군가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약자의 목숨으로 채워야 하는가? 왜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 타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가?


여성이 남성의 트로피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동물들도 인간의 보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보람과 행복을 위해 약자의 희생을 착취해야만 한다는 관점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이를테면 성접대 등-까지도 정당화한다. 내가 고생했으니 고기로 보상을 받겠다는 것은, 내가 힘들게 노력했으니 오늘은 여자를 좀 주물러야겠다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타자의 피와 살점을 착취하는 행위가 가부장적이고, 잔인한 야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시각적으로도 다른 동물의 살점이나 내 살점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여 이제는 징그러워서 먹고 싶지 않다. 다른 생명의 시체를 입에 넣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낀다.)






단순히 비건이 아니라, 자연식인 이유

내가 단순히 비건이 아니라 자연식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그냥 비건이라면 하루 세끼 콜라만 마셔도 비건이고, 비건 정크 푸드와 채식 라면, 비건 버거로 연명해도 비건이다.


그러나 비건 가공식품들은 인간에게 맞는 연료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 합성물질일 뿐이다.


인간-human-은 대지-humus-, 즉 땅에서 왔다. 우리는 자연이 만들고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이 길러낸 존재다. 자연에서 나온 인간은 마찬가지로 자연이 길러낸 것들을 먹어야 한다. 땅과 물과 흙과 바람이 힘을 합쳐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것을 먹어야 한다.


오늘날 항생제, 성장 촉진제로 범벅된 비정상적인 동물이 아니라 자연의 기운이 담긴 것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화학 첨가물로 범벅된 가짜 식품이 아니라 자연에서 나온 것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다.


지구의 물이 70%인 것처럼, 인간도 신체에서 수분이 70%를 차지한다. 인간의 체온이 1도가 오르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처럼, 지구의 기온도 그러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우리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실감할 기회는 많지 않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자연물의 무게보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인공 물질의 총중량이 더 많은 세계에 살고 있다.


흙 대신 아스팔트 도로 위를, 발 대신 고철 기계로 달리면서, 나무보다 콘크리트 건물 벽을 더 많이 보는 환경 아래 태양과 생체 시계보다 디지털시계의 일분일초에 맞춰 살아가다 보면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지각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인공물의 섬에 파묻혀 점점 기계화되고 있다.


자연에서 얻은 것을 가능한 자연 원물 그대로 먹는 행위는 자연의 구성원인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겪는 문제들을 직시하게 만들어준다. 또한 잃어버린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되찾게 만들어준다.


그동안 인류는 자연을 낯선 것, 통제와 지배의 대상으로 보고 착취하며 문명을 세워왔다. 나 이는 인간 존재의 토대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인간을 탄생시킨 어머니를 파괴하여 지금의 지구를 만들었기에, 문명은 감히 자기 파괴적이다.

 

자연식은 잃어버린 의식, 연결, 관계, 존재의 원천을 되찾는 작업이다. 문드러진 영성을 되찾고 자기 자신을 되찾는 작업이다.





현대 의학의 한계

이런 상황에서 현대 의학 또한 기계처럼 우리 몸을 다룬다. 어디에 문제가 생기면 그걸 완화시키는 약을 주고, 또 문제가 생기면 약을 주고, 약을 주고, 약을 주다 종래에는 수술한다. 개인들은 디지털 기기로 먹는 양을 측정하고 운동량을 측정한다.


하지만 고장 난 부분만 수리하면 된다는 식의 접근과 데이터로 수치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고 몸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을뿐더러 되지 않는 것을 되게 해야 하는 몸을 전쟁터로 만든다.


자연은 재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조건만 잘 갖추어주면 알아서 살아나고 살려낸다. 우리 몸 역시도 마찬가지다. 살아날 수 있는 환경만 잘 갖추어주면 알아서 재생한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이러한 인체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듯 보인다. 그저 증상을 완화할 뿐인 진통 요법이다. 자연식은 우리의 몸에 맞는 것들을 연료로 넣어줌으로써 몸이 살기 위해 잘 기능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준다.










지난 6개월 동안 나에게 있어 자연식, 채식은 단순히 내가 오늘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넘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준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먹는 것을 바꾸지 않았다면 아마도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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