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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25. 2022

위기들의 연결고리

환경 사회 경제 문제가 전부 한 뿌리에서 출발한다면

요즘 환경 위기와 기후 변화에 대해 다루는 뉴스들이 부쩍 많아졌다. 얼마 전 폭우로 인해 강남이 침수되었고, 수재민들도 여럿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다. 나 역시 퇴근길에 지하철 선로가 잠겨 하마터면 집에 돌아가지 못할 뻔했던 경험을 했다. 아마도 이번 폭우 피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상 기후에 대한 조짐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계와 경제계는 환경을 보지 못하고 있다. 기업은 오로지 이윤 추구에만 매달리는 듯하고, 국가와 정부는 오히려 기업의 논리에 포섭되어 기업을 부조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환경에 대한 대응이 공공의 아젠다로 다루어지기보다, 환경과 경제, 정치, 사회적 문제들이 서로 다른 영역으로 분리되어 별개의 일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경제계는 여전히 성장에만 집착하고, 정치계는 환경 관련 대응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회적 문제의 원인과 환경 위기를 불러온 원인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언론조차도 주목하지 않는다. 만연한 불행과 불평등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회적 타살을 뉴스로 다루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 수준 역시 제자리걸음과도 같다. 인류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지구의 안정적인 기후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삶의 터전과 먹거리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대지에서 나온다. 인류의 삶은 지구의 대지에 기반한다.


하지만 대지와 자연보다 기계와 인공물질에 둘러싸인 삶을 살고, 자연이 제공해주는 먹거리 대신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을 구입하거나 외식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대부분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며 살아간다. 환경이 오염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지구가 더러워지고 쓰레기가 쌓인다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땅에서 기반하며, 땅이 순환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구축해 온 모든 것들은 붕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튜브 댓글 창에는 "쓰레기도 결국 지구 자원의 가공품인데 뭐 어떠냐" "어차피 죽을 거 흥청망청 쓰고 죽자" 등의 반응이 팽배하다. 환경을 지키는 것이 단순히 도덕이나 미덕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의 구성원인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임에도 말이다.








앞으로 우리의 생각과 관점은 지금과 달라져야 할 것이다. 서구 근대 사상을 토대로 한 지금의 전 지구적 산업 문명은 지구를 생동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단순히 물질의 총집합으로, 자연을 자원으로 대상화하며 채굴을 정당화해왔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믿으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모든 생물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인 지구를 조각조각 나누어 부동산이라는 소유물로 취급하며 인위적으로 타자를 배척해왔다.


그러나 지구는 인간의 소모품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한 조건이다. 지구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그저 지구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지구의 만물은 저마다 그 존재 이유를 가진다. 산림은 인간에게 베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소는 인간에게 먹히거나 젖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지구는 지난 몇 백년 근대화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물질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조화를 맞추기 위해 생동하는 유기체다. 지구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 가장 조화로운 상태를 이루며 태어나고, 세상과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설계되어있다. 지구에 있는 개별 존재들의 작은 조화가 모여 세계의 큰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계가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자연과의 조화는커녕 자연을 대상화하고 인간의 지배 아래 통제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역시도 서로 돕고 상생하고 공생하는 조화로운 관계 대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경쟁하고, 각자도생 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이 정당화되고 있으며 자본주의라는 구조 아래 사회적 불평등까지 용인되고 있다.


인간 스스로도 좋은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쓸모가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노동 윤리 때문에 스스로를 사회가 제시하는 이상에 끼워 맞추고자 애쓴다. 여기서 발생하는 자기혐오와 자기 감시, 사회적 혐오는 덤이다. 늙는 것과 병드는 것은 유기체의 생애 주기에서 당연하게 찾아오는 것이지만, 병든 몸과 늙은 몸은 질 좋은 생산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피된다. 외형적으로 보기 좋지 않은 몸이나 장애가 있는 몸도 같은 이유에서 편견의 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모델은 개인의 고유함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조화롭고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존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체의 순환 과정을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소비주의 사회에 만연한 안전하지 않은 먹거리와 탐식을 부추기고 과식을 권장하는 식문화, 자기 착취 사회의 과로, 자기 관리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자기 감시는 생명체의 균형과 조화를 무너뜨린다.


이처럼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조화, 인간 스스로와의 조화를 깨뜨리며 살아가고 있다.



최근 뉴스에 자주 보이는 반값 치킨은 이 조화가 무너진 사회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가 행하는 바닥으로의 경쟁이 무엇을 망가뜨리는지, 대형마트 반값 치킨은 모든 것을 보여준다.

생태계 균형을 무너뜨리고 다른 동물종의 안녕과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양계장에서 닭이라는 동물의 목숨을 어떻게든 더 싸게 후려쳐 원가를 절감한다. 적은 인건비를 위해 최소한의 노동인력으로 최대치의 노동력을 뽑아내며 다른 인간의 노동을 착취한다.

단순히 가격 경쟁력을 가지고 더 많이 팔기 위해 만들어진 반값 치킨의 구조는 삶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 닭과 노동자들의 희생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 치킨에 들어있는 것은 가성비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낳은 착취의 결과물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사용인과 고용인이라는 두 인간의 관계가 전부 무너져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런 치킨을 소비하는 것은 또한 이러한 착취 구조에 대한 무지 또는 방관에 동참하는 것이다. 타인의 희생과 원한이 잔뜩 담긴 치킨을 먹는다면 그 파장은 개인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생명을 기만하고 존중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개인들은 스스로를 해치는 사회구조에 기여하게 된다.


저렴하다는 것은 반드시 무언가의 가치를 후려쳤음을 의미한다.








살림살이를 시장에 외주 주고 구입하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생활양식은 개인을 고립된 소비자의 위치에 놓이게 한다. 오늘날 현대인은 각 개인이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공동체나 자연으로부터 얻지 못하게 되었다. 개인들은 원자화되었고, 고립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오로지 상품과 서비스의 구입을 통해서만 삶의 필요를 충족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곧 삶의 질과 직결되며, 구매력이 부족한 소비자는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도 어려울 만큼 낙오된다.


삶이 힘드니까 착취를 기반으로 세워진 가성비가 유행하고, 자살이라는 탈을 쓴 사회적 타살이 만연해진다. 대부분 소비력의 부재에서 온다. 이러한 일이 합당한가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인권이 유린당하는 것이 마땅한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재산에 따라 차등 지급되고 있는 신-카스트제도나 마찬가지인 현실을 사람들은 묵과한다. 오히려 능력주의와 결탁해 정당화된다. 돈벌이를 못하는 인간은 무능력하기에 무쓸모 하며 무가치하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인데, 다시 말하지만 모든 인간은 존재함 그 자체로 가치 있다. 단순히 통장에 찍힌 숫자 따위가 개인의 가치를 셈할 수는 없다.


또한 다른 생명의 생명권, 목숨을 돈이라는 허구의 가치로만 환원하려 드는 태도는 옳은 것인가? 닭과 소, 돼지들도 저마다의 삶을 누릴 자격이 있는 생명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그들이 돈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따지며 어떻게든 그들의 목숨을 더 싸게 사고팔기 위해 애를 쓴다. 실제로 축사의 가축들이 병에 걸렸을 때, 이 동물들을 팔아 치웠을 때보다 손해라고 여기면 그 동물들은 치료되지 않는다.


편리함과 저렴함을 이유로 일회용품을 마구 사용하거나 판매하는 것은 물론, 잠깐의 쾌락을 위해 혹은 유행하기 때문에 실제로 나에게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필요에 의한 소비를 하고, 필요에 의한 생산을 하고 있지 않다. 오늘날 만들어지는 물건들은 사실 기본적인 인간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된다거나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과자, 인스턴트 라면,  형형색색의 종류별로 나오는 화장품, 몸을 불편하게 만드는 아동복 사이즈의 여성복, 사양에 별 차이가 없지만 일단 만들어내기 바쁜 신상 스마트폰 등등은 인간에게 이롭지도 않고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단지 기업의 새로운 이윤 창출을 위해 계속해서 신상품 딱지를 달고 쏟아져 나온다. 많이 팔기 위해 유행을 만들고, 그것이 힙하다고 여기도록 광고를 때린다.


오늘날 만들어지는 상품 대부분은 필요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 생산에 의한 필요로 소비된다.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의 필요로 생산된다. 이렇게 불필요한 생필품들을 하나씩 늘리는 과정에서 자연을 채굴해 만든 쓰레기를 매입해 다시 쓰레기로 배출하는 일을 반복한다.


쓰레기도 자연에 있던 것을 가공해서 만든 건데 뭐가 문제냐는 말도 하는데, 자연은 지구 생명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반면 쓰레기는 그렇지 못하니까 문제다. 자연은 계속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순환하지만 쓰레기는 더 이상 쓸 수 없으니까 쓰레기다. 우리가 쓰레기를 왜 쓰레기라고 부르는지 잊어선 안 된다. 더군다나 쓰레기에서 나오는 유해 물질은 돌고 돌아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생수를 마시고 페트병을 배출하면 할수록 우리는 미세 플라스틱을 마시게 된다는 소리다.



또한 기업은 마케팅을 통해 인간을 기만한다. 모든 인간을 지금 현재 상태에서는 불만족스럽다 여기도록 만들고, 그것을 상품 구입으로 해결하라는 기만질이 마케팅이다. 만들어진 불만족에 조종당해 불필요한 소비를 하게 되면 우리의 진짜 필요를 충당해 줄 자연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형태로 가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생명을 팔아 만든 물질적 풍요는 추후 필요의 빈곤으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이소만한 악덕 기업도 없을 것이다. 그토록 수많은 다양한 상품을 저렴하게 내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후려침의 과정이 있었을지, 얼마나 많은 자연을 고갈시켰을지 생각하면 말이다. 또한 필요에 의해 다이소에 갔다가 진열된 상품을 보고 필요를 느끼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혹은 물건 하나를 샀다가 그 물건을 관리하기 위해 또 물건을 사고 또 그 물건을 위해 물건을 사는 경우도 생긴다. 예를 들어 보관용 네트망을 사고, 네트망을 걸기 위해 네트망 걸이를 사는 식이다. 과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생명을 가장 등한시하고, 경제를 가장 우선시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왔다. 처음 경제 성장은 잘 살기 위한 경제 성장이었으나 지금의 성장은 성장을 위한 경제 성장이다. 좋은 삶을 위한 수단이 목적으로 전도되고 말았다.


무조건 경제의 논리가 최우선인 사회는 필히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들을 등한시하게 된다. 예컨대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 동물들의 생명권, 생태계의 터전과 기반이 되어주는 자연의 소중함 말이다. 우리 인간을 포함해 자연이 주는 모든 선물은 귀하고 값진 것임에도, 상품성을 이유로 본질은 동등한데 어떤 것은 비싼 값에 팔리고 어떤 것은 버려진다. 못난이 농산물부터 취업 시장이라 불리는 것까지 이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연애도 시장이 된다. 우리는 서로의 인격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지, 사업하기 위해 관계 맺는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환경의 위기는 우리의 감수성에 대한 부재에서 출발한다. 위계질서와 우열을 매기고,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며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 쓸모 있는 인간과 아닌 인간을 구별하였기 때문에 들이닥친 위기이다. 우월한 것이 열등한 것을 지배해도 된다는 이원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상체계가 오늘날의 위기를 만들었다. 이 사상체계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올려치며 자연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의 착취, 동물에 대한 인간의 학대, 남반구에 대한 북반구의 착취, 정신과 신체의 분리, 여성 가사 노동의 가치 등한시 등의 원인이 된다.




생명과 살림살이를 뒤로 하고 돈이 목적이 된 지금의 체제에서 벗어나 우리는 다시 밥 잘 차려먹고 사는 일, 사람들과 어우러져 행복하게 삶을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가장 등한시했던 생명의 존엄성을 가장 최우선의 가치로 올려놓아야 한다.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유리된 재산 불리기보다 진짜 삶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돈이 없어도 모두가 영양가 있는 밥을 먹고, 따뜻한 공동체의 온정을 느끼고,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휴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살림살이를 다른 사람의 임금 노동에 외주 주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를 꿈꿀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보고 생명을 돌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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