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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19. 2023

인간답게 산다는 것

언제부터 의식주가 상품이 되었는가? 언제부터 인간은 삶의 모든 것을 오로지 소비로만 해결해야 하는 소비기계로 전락했는가? 의식주는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조차 지금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것이 과연 옳고 타당한 현상일까? 생존하기 위해 돈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









얼마 전, 한 경제 뉴스에서 올 해 커다란 경제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경제학자들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런 경제 위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때부터 있던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본인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걸까?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사라졌고, 그 때도 존재했던 경제 위기가 현대 문명에도 닥쳐왔다는 것은 곧 현대 문명도 몰락할 위기에 처해있음을 의미한다.





흔히들 현대사회와 전통사회를 부를 때, 현대 사회는 현대“문명”이라 부르고, 전통사회는 전통“문화”라고 부른다. 문명과 문화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문화는 인류가 오랜 시간 자연의 구성원으로서 자연을 해치지 않고 어우러져 터득해 온 삶의 기술인 반면, 문명은 인류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겠다는 탐욕에서 비롯된 파괴의 기술이다. 문화는 인간이 땅에 터전을 잡고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준 기반이다. 따라서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전승되어 내려왔다. 반면 문명은 지구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몰락하거나 사라졌다.


4대 문명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몰락했고, 잉카나 아즈텍과 같이 고도로 발전한 고대 도시 문명도 지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도시 문명은 반짝 빛나다가 사라졌다. 이는 문명 그 자체가 가지는 폭력성과 약탈성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문명이라는 것은 자연의 일원인 인간이 생명의 터전이자 젖줄인 어머니 대지를 침탈하고 입맛대로 뜯어고쳐 재구성해 보겠다는 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도시의 문명은 우리의 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자급하지 못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도시 안에서는 의식주를 자급할 수 없다. 에너지도, 식량도 전부 외부로부터 공급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시는 에너지와 식량을 공급해주는 외부에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식민화 할 곳을 찾아 이곳저곳 손을 벌려가며 제3세계와 농촌, 에너지 수입 국가에 기생해야만 한다. 아무것도 자립할 수가 없다. 만약 외부의 에너지나 식량 공급 체계가 무너지면 도시는 지속될 수 없다. 그 길로 끝이다.


농사를 짓고 호롱불을 켜는 생활을 야만적이고 미개하고 시대에 뒤쳐진 것이라고 비웃겠지만, 사실은 정 반대다. 위기가 닥쳤을 때, 다른 나라의 석유 자원이 고갈되고 식량 자원 수급이 불안정해 졌을 때 가장 회복탄력성이 높은 것은 지금처럼 음식을 수입해 먹고, 전기를 끌어다 쓰는 구조가 아니라 촛불을 켜고 농사를 짓는 쪽이다. 서구 근대 이후의 발전론은 가장 자립적이고 독립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안정적이자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치부하였다. 기술 문명만이 진보적인 것이며 그렇지 않은 형태의 삶은 미개한 것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선을 그어버렸다. 지역에 맞춰 살아가던 전통적인 삶의 모습은 사라지고 전세계가 똑같은 도시의 모습으로 맥도날드화 되어버렸다.


그러나 도시는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도시인들 먹고 살 거리를 뽑아 와야만 유지될 수 있는 착취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온 지구가 도시화 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오죽하면 화성까지 식민지로 삼겠다고 난리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이는 전부 문명이 식민주의와 계급 착취의 논리를 가지고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더욱 극대화되고 있는 상태다. 내가 더 가지기 위해 남의 것을 약탈하고자 하는 경쟁의 논리가 자본주의의 논리다.  



현대 문명에서 의식주는 자본의 영역에 포섭당해 상품이 된 것으로도 모자라 오락과 쾌락, 탐욕의 대상이자 계급적 상징으로까지 변질되고 말았다. 단순히 누워서 잘 곳, 추위를 피하고 몸을 가릴 것, 굶주림에서 벗어나 영양을 공급해주는 것의 의미를 떠나 좋은 집, 좋은 옷, 맛있는 음식에 대한 열망이 기괴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기본적인 삶의 욕구마저 병적인 욕망으로 물들어버렸다. 의식주를 마련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이나 그것들을 직접 가꾸고 마련하는 과정을 겪지 못하고 완성된 제품을 구매하기만 해야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불만족감을 물질에 대한 욕구로 채우려는 것이다. 이는 비단 현대 사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도시 문명이 공통적으로 겪었다. 지배계급일수록, 상류층일수록, 먹는 것 하나조차 병적인 탐닉으로 물들어 결국에는 영양에 문제가 생겨 죽고 말았다. 이집트 문명도 로마 문명도 그랬다. 만연한 먹방과 화려하게 꾸며진 거짓된 음식의 향연을 보면서 나는 곧 현대 문명도 병들대로 병들어 몰락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볼품없고 보잘것 없어 보일지 몰라도 스스로 짓고 스스로 만들고 성취감을 느끼고 삶을 자율적으로 창조해 나가던 삶의 방식을 잃고, 오로지 소비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게 된 데다, 그 소비력이 곧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게 되고 마니 소비에 대한 욕구만 비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상품일 뿐이다. 나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도, 창의력을 발휘할 수도 없고, 적극성, 능동성을 발휘할 수도 없다. 아무리 좋은 상품들을 많이 구매해봤자 결국 기업이 만들어놓은 선택지만을 수동적으로 고르면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 안에 잠재되어있는 창의력과 능동성은 상품 구매라는 수동성에 가려지게 되었다.


수동적으로 상품을 사기 위해 수동적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몸이 좋든 안 좋든, 아침이 일찍 찾아오는 여름에도, 늦게 해가 뜨는 겨울에도 늘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시간에 맞춰서 출퇴근을 한다. 근본은 인간인데 인간이 오히려 기계의 시간에 맞추며 살아가는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인간이 있고 지하철이 있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지하철이 있고 인간이 있다. 이게 프로그래밍된 기계의 삶인지 인간의 삶인지 도통 헷갈릴 지경이다.


게다가 상품 소비는 사람의 시야를 가린다. 모든 물건이 돈만 내면 끊임없이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무슨 금 나와라 뚝딱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고, 돈만 휘두르면 원하는 것을 계속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지구에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쓰다 버리면 끝인 생활을 이어나갈수록 고갈될 뿐인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도록 만든다. 음식이 언제 어디서든 돈만 주면 나오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니 궁금해서 과소비하고 맛 없으면 죄다 남긴다. 불필요한 물건인데 충동적으로 구매한다. 이미 있는 물건인데 디자인이 마음에 안든다고, 성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새로 사고 바꾼다.


세상이 자판기처럼 변한다. 구매 버튼만 누르면 모든게 자동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이 착각하게 만든다.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고, 전기도 물도 어디에서 오는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낭비하게 된다. 얼마나 더 쓸 수 있는지, 얼마나 더 남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버튼을 누르고 스위치를 켜고 수도꼭지를 틀면 계속해서 나올것만 같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삶에 필요한 에너지와 의식주가 장거리로 외부화되고, 복잡한 구조를 거쳐서 공급되면 될수록 낭비를 부추긴다.


이는 완벽한 기만이다. 지구는 모든 생명이 공생할 수 있을 정도로는 넉넉하지만, 소비주의에 현혹당한 인간들의 낭비벽을 견딜만큼 무한하지 않다.


기술혁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것은 애초에 커다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자원을 필요로 한다. 기술을 감당하는 비용은 공짜가 아니다. 인간은 배터리를 먹을 수 없고 반도체를 먹을 수 없다. 지금의 위기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자꾸 만들어내려고 했기 때문에 과도함에서 온 문제다. 무엇을 더해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뺄셈으로 해결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지구에 비용을 부담하지 않을 수 있다. 인류가 600만년동안 진보도 발전도 없이 살아왔던 이유는 애초에 모두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돈 없이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아니 오히려 돈이 없기에 더 존엄하고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급자족적인 삶을 살고 싶다. 인간다운 삶을 되찾고 싶다. 궁색해 보일지언정 내가 삶에 필요한 것들은 직접 마련하고 싶다. 자립자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 가능하면 단순한 구조로 살고 싶다. 음식은 내가 직접 농사지어 길러먹고, 가구나 생필품은 내가 직접 만들고, 옷도 내가 나에게 편한 방식으로 지어 입고, 집도 최소한만 갖춰두고 살고싶다. 에너지는 최대한 내 몸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열이 필요하면 직접 불을 때서 쓰고 싶다.




본래 우리는 집을 지어 살고, 옷을 지어 입고, 농사를 짓고, 밥을 지어 먹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모든 것들을 짓는 대신 사는 삶을 살게 되었다. 나는 사는 인생 대신 짓는 인생을 살고싶다. 인간답게 살고싶다. 수동적인 기계의 삶 대신 자율적인 인간의 삶을 살고 싶다. 최소한의 것만을 필요로 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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