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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Dec 09. 2022

동물도 울고 나도 울었다

1%를 위한 99%의 가축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루한 매일을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평범한 직장 생활만큼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내가 얼마 전 직장인 체험을 할 기회를 얻었다. 사무보조직 일자리를 구하게 된 것이다.


하는 일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내가 일하게 된 곳은 세상에 존재하는 오만가지 자격증들을 한 데 모아볼 수 있도록 사이트를 운영 중인 모 스타트업인데, 조사해놓은 자격증 자료를 사이트에 업로드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컴퓨터만 두들기며 느낀 점은 '이토록 삶이 의미를 상실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었다.








1. 햇빛 아래에 있을 때와 LED등 아래에 있을 때 컨디션은 사뭇 다르다.


그 전까지 나는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날씨가 너무 궂은 것만 아니라면 매일 아침에 아파트 단지 산책로를 걸었다. 상쾌하게 불어오는 자연의 바람과 따사로운 햇빛은 사람을 깨워주는 효과가 있다. 몸이 기지개를 켜며 개운하게 깨어나는 느낌이다. 자연광과 자연풍은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피로를 해소시켜주는 듯한 기분이다.


일주일에 두 번, 아침 일찍 편의점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날이 있다. 아침 꼭두새벽부터 인위적인 조명과 에어컨 또는 난방 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 이틀은 아침이라는 시간에 걸맞게 자연스러운 정도의 햇빛, 조도를 받았을 때와 컨디션이 다르다. 우선 눈이 피로하고, 머리가 피곤하다. 아침 6시라는 시각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조명이 사람을 그토록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계절감에 맞지 않는 인위적인 온도는 오히려 몸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그렇게 몇 시간동안 편의점에 있다가 점심 대낮이 되어 퇴근을 할 때가 되어 편의점을 나오면, 적당한 광도와 온도가 몸을 노곤하게 풀어준다. 우리 몸은 수백만년동안 자연 속에서 살아온 기억을 토대로 작동한다. 당연히 자연에 있을 때와 인공적인 환경에 있을 때 몸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접촉할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아침에 일어나 자동차 혹은 대중 교통위에 몸을 싣고 아스팔트 도로나 철로 위를 달려 회색 빌딩 숲에 들어간다. 하루 종일 기계와 인위적인 조명들 사이에 둘러 싸인 채로 컴퓨터 앞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움직이지도 못한다. 와중에 겨울인데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난방을 틀어댄다. 겨울이면 겨울답게 조금 춥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겨울에도 더운 바람을 쐬며 졸음이 오게 만들고, 졸음을 견디려고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 건 과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난방의 탁한 바람에 오히려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출근 첫 날엔 오죽하면 당장 사무실을 뛰쳐 나가 찬바람이라도 쐬며 달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2. 지나친 안락함이 불러온 몸의 소외


사무환경은 쾌적하다고 말하면 쾌적했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뉘이고 손가락만 움직이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가짜 쾌적함이 오히려 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너무 몸을 쓰지 않으니 다리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몸을 방치해도 괜찮은 것일까 싶을만큼 하루 종일 앉아서 움직이질 않는다.


 그렇게 근육이 존재 의미를 잃고 무상해짐과 동시에 반복적인 타이핑 작업과 마우스 클릭 등으로 인해 팔꿈치, 손가락 관절이 마모된다. 이렇게 몇 년만 살면 퇴행성 관절염, 류마티스 관절염, 손목터널 증후군, 라운드 숄더, 거북목, 척추 혹은 목 디스크를 면치 못할 게 뻔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해서 돌아오면 지치거나 시간이 없어서 수영을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전부 기우였다. 몸이 뻐근해서 오후 3~4시쯤 되면 당장이라도 물에 뛰어들고 싶어 좀이 쑤신다. 주기적으로 일어나 서서 업무를 보거나 의자를 두고 쭈그려앉아 업무를 보기도 했다.


계절감을 상실할 정도로 아늑한 사무실 온도는 오히려 갑갑하게 느껴졌다. 상쾌한 바람과 산책이 절실했다. 이게 문명의 이기인지 문명이라는 동물원에 갇힌 건지 주객이 전도된 듯 하다.


다리를 쓸 기회를 잃어버린 통에 점심 식사 전후는 계단을 이용하고, 퇴근시에도 계단으로 내려간다. 오히려 그 시간엔 승강기에 사람이 몰리기 때문에 계단을 이용하는 쪽이 훨씬 빠르기도 하다.





3. 보람 없는 노동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을 잃은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


단순한 반복 사무작업 속에서 도저히 이 일의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다 누구를 위한 일이란 말인가. 세상을 이롭게 만들지도,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느낌도 받지 못한 채 의미없이 타이핑만을 반복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가 타인에게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에서 보람과 의미를 느낀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사무실에 앉아 살림 살이와 전혀 관계되지 않은 일을 하면서 그런 감각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자격증 정보 긁어 모아 홈페이지에 업로드하는 이 일이 당최 타인을 먹여살리는 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기여하는, 세상에 없어선 안 될 일이 맞느냐는 거다. 누가 이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일을 하자고 제안했는지, 그 발상이 오히려 기상천외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세상에 없어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전력도 낭비하고 자기 삶도 낭비해야 하는 게 직장인의 삶인가. 살아가는 보람을 잃고 자유도 잃으니 남은 것은 소비로 그 분풀이를 다하는 것이다. 이로서 자유를 위해 소비하고 소비를 위해 자유를 헌납하는 굴레에 빠진다. 새로움도 보람도 없으니 그저 식도락, 물욕, 여행으로 무의미해진 삶을 채워보려 애쓰는 것이다. 살림 살이와 관계 없고 누군가에게 기여하지도 못하는 붕 뜬 노동은 이처럼 인간의 영혼을 질식시킨다.


업무를 하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노동인가?"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애써 만들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대우받고, 정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가사노동이나 농업은 도리어 멸시당한다.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와 소통하는 일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에 도대체 무슨 기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돈으로 인해 세계의 구조가 완전히 뒤집혀버렸다.





4. 생명의 가축화


그렇게 손가락  아프게 자격증 정보를 정리해 업로드하던 도중 축산물품질평가사 시험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축산물품질평가원이라는 곳인데, 단어의 조합들에 구역질이 일었다. 살아있는 동물을 축산물이라는 단어 하나로 일축시키고 품질이니 뭐니를 따져가면서 평가하겠다는 저 단어들이 '우리는 생명을 살아있는 것 보듯 하지 않겠다. 식육을 위한 동물들은 그저 공산품에 불과하다'는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연이 낳은 소산인 동물들을, 우리와 같은 생명체인 동물들을 도살하고 도려내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장식해 놓고 마치 공장에서 나온 생산품을 대하듯 그 품질을 따지고 등급을 매기겠다는 발상 자체가 잔인하게 느껴졌다. 생명에게 품질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다는 게 어이 없고 화가 나서 작업하다 눈물이 다 났다.


반대로 놓고 생각해보자. 인간을 생산 공장 위 컨베이어 벨트에 진열해 놓고 품질에 따라 등급을 매기며 평가하는 장면을.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매체 혹은 작품이 있다면 우리는 이를 디스토피아 장르로 분류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을 대상으로는 이미 이와 같은 행위를 벌이고 있다. 내가 당하면 디스토피아지만 다른 동물이 당하면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된 감수성일까. 생명을 공산품으로 대하는 이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없다면, 이는 필히 인류 스스로에게도 파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도 이 생명의 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물들을 데리고 저지르는 행위는 그 세계관을 고쳐먹지 않으면 인간 자신들에게도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살아있는 것을 죽은 물질 취급하고, 자본 생산을 위해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해지는 일은 인간들의 자학이다.


동물이 언제부터 기계처럼, 그저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처럼 취급당하기 시작했을까? 이 일련의 행위들은 모두 자본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고기라는 상품을 팔아 치우기 위해서, 돈을 만들기 위해서 생명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 금전적 이익을 위해서 다른 종족의 삶을 희생시킨다. 인간은 동물을 좁디 좁은 축사에 가두고 단지 돈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로 살다 죽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문득 익숙하게 느껴졌다.


인간이 동물을 저렇게 대하니, 인간은 곧 인간 스스로를 자본 생산을 위한 도구로 대하기 시작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단지 자본 생산이라는 목적 하에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일을 평생 하다 죽는다. 언젠가 네모 박스처럼 똑같이 생긴 아파트가 문득 돼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인간을 전부 똑같이 생긴 네모 박스 안에 가둬두고 평생을 그 곳에서 살게 만든 건 다름아닌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그 곳에서 잠만 자고 아침이 되면 네모 박스같은 사무실에 끌려가 하루종일 발이 묶여 돈을 만들기 위한 일을 한다. 그러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이고 쓰러져 잠을 잔다. 친구에게 직장 생활 후기를 들려주었더니 이런 말을 하더랬다.


"이건 뭐 잠만 다른 곳에서 자다 아침 되면 울타리 쳐진 자기 축사로 끌려가는 가축이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다는 표현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자본에 삶을 희생당하고 처참하게 생을 마치는 그 애환이, 현대 도시적 삶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대하고 얻은 결과다. 인간은 동물을 축사에 밀어넣어 그들을 저답게 살아가야 하는 생명이 아닌 자본 생산을 위한 도구로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자본 생산의 도구로 전락시키며 동물 우리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동물 우리같은 일터에 나가 무의미한 노동에 삶을 바치게 되었다. 인간이 동물에게 한 일은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돌아온다.


닮은 것은 다만 삶의 방식만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인간을 대상으로 품질 평가 따위를 하고 있다. 스펙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그렇다. 사람이 생명 그 자체로 대우받지 못하고 자본을 얼마나 잘 생산해 낼 수 있는 도구인지로 측정당한다. 인간의 쓸모는 돈벌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돈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 생산성에 인간의 모든 가치와 쓸모가 있는 것처럼 스펙을 따지고 등급을 매긴다.


이 정도 대학 나와서 이런저런 자격증이 있고, 이만한 회사에 다니며 이 정도 연봉을 받는데 어떤가요, 하며 스스로를 매대위의 상품 대하듯 품질을 평가한다. 현대 사회 자체가 인간품질평가원인 셈이다. 현대 도시는 그야말로 잘못 만들어진 인간 동물원에 불과하다. 현대 도시에는 인간이 어떤 종족인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현대인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은 잘못된 환경에 스스로를 가둔 데서 나온 정형행동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전부 잃었으니 범죄와 우울, 피로, 정신질환이 만연해질 수 밖에 없다. 동물들이 맞지 않는 좁은 환경에서 정형행동을 하듯, 인간도 그렇게 소비와 쾌락 중독, 범죄, 우울, 번아웃에 시달릴 수 밖에 없게된다.





돈을 위해서, 상위 1% 자본가를 위해서 오늘날 지구의 99%를 차지하는 인간과 소, 닭, 돼지 등은 가축화되었다. 가축이 되기 위해 태어나는 생명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자본이 지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작금의 행태는 지속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지속되어서도 안 된다. 누누이 말하지만 재난이 닥쳤을 때 카드를 씹어먹고 연명할 순 없기 때문이다.


돈은 인간이 만든 규칙일 뿐, 우리가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가는 데에 있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식물공장이나 스마트팜같은 허황된 소리도 같은 세계관에서 나온다. 식물도 당연히 생명이기 때문에 햇빛을 받고 토양의 미생물들이 작용하여 만들어주는 양분을 먹고 자라야 한다. 그런 식물을 LED 조명 아래에서 키우겠다니. 인간도 LED등 밑에만 있으면 비타민D 합성이 안 되는데 웃기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가 생명이라는 자각조차 잃어버렸다. 인간의 먹거리는 공장이 아니라 논, 땅, 밭에서 나온다. 기업이나 연구실, 슈퍼마켓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주는 것이 인간의 참음식이다.


우리의 위기는 배양육을 만들거나 스마트팜을 만들거나 GMO 종자를 만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양육, 스마트팜, GMO 모두가 지금의 위기까지 인간을 몰고 온 바로 그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 발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과학으로 분석하여 분해할 수 있고, 생명을 자본의 입맛대로 조작하겠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자본과 기술을 쫓지 않을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와 똑같은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돈에 끌려다니는 현대적 삶을 멈추고 진짜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는다면 인간은 실존적,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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