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Nov 11. 2022

이렇게 늙고 싶다

https://youtu.be/3_oUIWdmi98


얼마 전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런 영상이 떴다.



할머니와 선장님이 생명을 보살피고 거두어들이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진정으로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교감하고 공생하며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상 그 자체라고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동물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인간이 동물의 위에 있다고 위계질서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영상 속 할머니와 선장님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인간이고, 쟤들은 동물들이지만 진정으로 갈 곳 없는 생명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에게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살아있는 것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모습이 순수하다. 아름답다.

별 거 없는 살림이지만 저 아이들-길고양이, 떠돌이 개들-을 살리기 위해 내 살림 기꺼이 내어 주는 모습은 정말로 그들을 함께 살아가는 같은 생명체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삶의 태도에는 에고가 없다. 자아도취가 없다. 현대에 만연한 나르시시즘은 없다. 오직 타자를 위해 나를 비우고, 타자에게 마음을 쏟는 에로스만이 존재한다. 각자도생과 고립의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에의 에로스를 할머니와 선장님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저렇게 동물들과 하나 되어 교감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인간의 본모습이 아니었을까? 단순히 내 만족으로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과 영상 속 할머니가 동물들에게 말을 걸고 밥을 챙겨주고 새끼를 걱정하는 모습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른 종이지만 고양이는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다. 큰 개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개가 안전히 새끼를 낳을 수 있도록 자리를 지켜낸다. 선장님과 할머니는 동물의 심정이 어떨는지 자기 일처럼 공감하고 도와주려 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교감하고 공생하는 모습이 이런 것임을 깨닫게 만들어주었다. 저렇게 사는 삶이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요, 되찾아야 할 미래라고 생각했다.

저런 삶의 모습이 불과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는데, 지금은 온데간데없고 죽어버렸다. 까치밥도 남겨두고, 콩 한쪽도 나눠먹고, 하나는 새가 먹고 하나는 벌레가 먹도록 해야 한다던 정신은 사라지고 말았다.

 인간은 자꾸 남들과 자신을 분리해갔다. 타자를 배척하는 주거 양식이 들어서고 점점 남들과 단절되는 아파트의 모습이 꼭 그렇다. 현대의 주거공간에 다른 생물종과 타인의 침입은 허락되지 않는다. 길고양이에겐 밥을 줘선 안된다. 강아지가 짖도록 해서도 안된다. 이웃과는 소통하지 않는다. 옆집이 비든 말든 모른다. 아이를 맡기지도 못한다.
하늘이라는 한 지붕과 땅이라는 한 마루 사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던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일 텐데, 지금 사회에서 생명을 향한 에로스와 공생의 가치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요즘은 매일 수영을 한다. 물속에 있으면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물이 나를 감싸는 편안함만이 느껴진다. 물이 좋다. 물이 주는 감촉이 좋다. 물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안정감이 좋다. 집에 있을 때보다 물에 있을 때 더 마음이 편안하다. 심신이 차분해짐을 느낀다. 수영을 하면서 여러 생각도 들었다가 정리가 되었다가, 영감을 얻기도 한다. 평생을 물에 몸담그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진지하게 바다가 가까운 곳으로 터를 잡아 물질을 하며 살까 싶을 정도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더 와닿았던 것은 할머니가 마침 해녀였다는 거였다. 영상을 보면서 생각했다. 딱 저렇게 늙고 싶다. 가진 것 없어도 뭇 생명들에게 다 내어줄 수 있도록, 나를 내려놓은 태도로 살아가고 싶다. 아흔의 나이에도 바다를 헤엄치고 싶다. 생명을 보고 예찬하며 살아가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살아있고 변화하는 생명들을 경시하다 못해 혐오하게 되었다는 것. 통제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을 경멸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다가 급기야 자신의 신체와 자연을 방해꾼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 사람들이 아무런 생명도 지키지 못하고, 하물며 자기 자신조차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다. 노화같이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역행하려 애쓰고, 변화하는 유기체인 우리 몸을 고정 불변의 상태로, 가장 최적화된 상태로 유지하려 애쓰는 유전 공학과 미용 산업이 그러하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자기 파괴적이다.




누군가는 과잉으로 인해 죽고, 누군가는 과잉의 시대 속에서 스스로 결핍을 갈망하다 죽고, 누군가는 살고 싶어도 절대적 결핍으로 인해 죽는다. 지구 역사상 이렇게 불평등한 분배로 전 세계인이 다 같이 골병에 든 적도 없을 것이다. 병적인 사람들이 만연하다 못해 당연해졌다. 세계가 이렇게 아파하게 된 것은 우리가 인간 본연의 모습에서 너무 멀어졌기 때문에 돌아온 응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생명에 대한 사랑과 타자에 대한 관심을 저버렸기에 분명 벌을 받는 것이리라.

작가의 이전글 생명이냐 반(反)생명이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