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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Nov 07. 2022

생명이냐 반(反)생명이냐

생명과 대립하는 현대 사회의 모순

산업 경제는 식량을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식량은 본디 살아있는 생명들이었다. 그러나 기업은 생명을 상품으로 접근했다.


기업은 미리미리 대량으로 생산하고, 그 재고품을 팔아야 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음식은 부패하거나 변하거나 상해버린다. 산업 경제의 방식과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음식을 다 정제하고 죽여버리는 거다. 살아있는 쌀, 심으면 발아하는 생명력 있는 쌀은 대량생산과 판매용 상품이 되기엔 적합하지 않기에 백미로 싹 도정해 죽은 씨앗을 팔게 된 거다.


밀도 마찬가지다. 통밀보다 백밀이  산업 경제의 상품으로 적합했기에 정제한 것이고 소금이나 설탕 역시 다르지 않다. 미네랄이 살아있고 영양소가 살아있는 원래의 형태 대신 기업이 저렴하게 대량으로 팔아치우기 좋도록 함부로 가공하여 소비자들의 식탁에 올린다.


거기엔 공장식 축산처럼 대놓고 반생명적인 것도 포함된다. 소는 풀을 뜯는 동물이지, 곡식을 먹는 동물이 아님에도 GMO곡식으로 만들어진 사료를 먹인다. 많은 양의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의 몸집을 병적으로 부풀린다. 동물에게 항생제와 성장 촉진제를 맞혀 과지방적인 몸으로 만든다.


낙농업은 젖소를 생명으로 대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소는 단지 젖을 생산하는 기계로 간주된다. 공장에서 살균처리 한 팩 우유를 매대에서 구입하는 소비자는 이것이 살아있는 동물의 젖이라는 생각대신, 그저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음료라고 믿고 만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음식을 마트에서  상품으로 접하니 내가 먹는 것이 어디서 난 것인지, 내가 먹는 것이 곧 내가 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자본주의 상품 경제는 식사를 상품화시켜 인간의 건강을 희생시킨다. 미용 산업은 몸을 조각조각 해체하여 상품화 한 뒤, 건강한 몸이 되기 위해 닭가슴살을 섭취하라고 광고한다. 의료 산업은 근본적인 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대신 꾸준히 약을 먹여 증상만 완화시킬 뿐이다. 이런 의학은 사람을 치유하는 대신 사람을 고객으로 삼는다.

인간은 건강을 담보로 한 마케팅의 굴레 안에서 평생 구르게 된다.


우리의 식생활이 대기업의 손아귀에 넘어가 자연의 영양을 먹는 인간에서 상품을 먹는 소비자로 전락한 탓에 오직 기업이 차려놓는 죽은 음식만을 장바구니에 넣으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운이 다 죽은 불량 상품을 먹는 소비자가 생명력 넘치는 신체와 살아있는 영혼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산업 문명은 반(反) 생명적이다. 산업 문명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파괴를 전제로 한다.   








인간은 생명력 없는 것에 의존할수록 생명력을 잃어간다.


죽은 음식, 생명력 없는 음식을 먹고,

생명이 깃들어있지 않은 기계에 몸을 맡기고,

인간 본연의 힘이나 동물의 힘과 달리 어디서 오는지 일상에서 알 길이 없는 전기 에너지와 화석 연료 따위처럼 생명에서 나오지 않는 에너지에 생활을 맡기고, 

생동감과 다양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네모난 우리(cage)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인공물로 둘러 싸여 생명의 기운이 소멸한 도시 한복판에 있을수록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자생력을 잃어간다.



인간은 초인간적인 존재를 꿈꾸며 열심히 기계 공학을 발전시켰지만, 정작 그럴수록 인간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적어진다.


인간은 자동차를 개발하고 오히려 두 다리가 무력해져 걷는 것을 힘들어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개발하고 도리어 두 발이 무력해져 계단을 오르는 것이 벅차게 되었다.


인간은 기계를 만들고 기술을 발전시켜 순식간에 고층 빌딩 옥상까지 도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내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아닌 외부화된 에너지에 의존하게 되면서 옥상까지 도착하는 동안 그저 수동적으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만 있게 되었다. 현대인은 인간의 능력과 신체를 죽여버리는 이런 반 생명적인 선택이 우월한 것이며 진보라고 믿게 되었다.


또한 이는 순식간에 높은 곳까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지를 망각하게 한다. 위로 올라갈 때는 계단을 오르면서 내가 힘이 드는 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를 지각할 수 없는 곳으로 외부화함으로써 이 모든 것이 공짜로 가능하며 무한히 지속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요즘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내 두 다리로 걷는 기쁨이다. 하늘이 걸을 수 있도록 튼튼한 다리를 주셨으니 이 다리가 쓸모없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내 몫이 아닐까.


모든 것을 기계와 기업에 맡기다 쇠약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으로 퇴화하고 싶지 않다. 생명력을 잃고 싶지 않다. 내가 내 삶을 꾸려나갈 자발적 활동성을, 활기를, 생기를 잃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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