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Apr 11. 2023

현대인이 모르는 진짜 평생 숙제

날이 갈수록 우리는 개성을 표출하고 싶어 하고, 더 개인화된 것, 세분화된 것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개인 맞춤형 상품이 늘어나고 있고, 매일매일 기분에 따라 나만의 냉장고를 만들거나, 가전을 만들거나 하라고 광고합니다. 핸드폰 색도 내가 원하는 대로 조합할 수 있게 해 주고, 하다못해 침대도 내가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다며 광고하지요.


이러한 상품들은 분명히 장점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가지고 똑같이 만족할 순 없으니까요. 획일화된 상품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기엔 한계를 지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취향에 맞출 수 있는 상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광고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맞춤형 상품으로 남들과 다른 너를 "보여주라"라고 말이죠.


사람들은 점점 타인과 다른 나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남들과 다른 나의 희소가치를 세상에 전시하려 합니다. 오로지 나만 가질 수 있는 것에 더욱 집착하기도 합니다. 다품종 소량생산과 오더메이드, 비스포크, SNS 피드와 유튜브는 모두 이런 심리를 자극한다는 데에 공통점을 둡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 속에서 현대인은 점점 더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 없으나 오로지 나만이 맞고, 절대적이며, 나라는 존재가 자의식 안에서 지나치게 큰 존재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의식 안에 오로지 나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에고에 질식당합니다. 자아가 내 안에서 너무 비대해진 나머지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존재에 대해 과대해석하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증상을 자아의 비만상태라고 부릅니다.



현대인이 처해있는 진짜 문제는 이 자아의 비만입니다. 현대인은 몸만큼이나 자아 역시도 비대해지고 말았습니다. 자아에 질식당한 삶은 죽는 것보다도 더 괴로워집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달라지기 위해 애를 쓰는 걸까요? 우리는 왜 그토록 세상에 나를 표출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에고 바보'가 되었을까요?

저는 여기에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모든 것이 상품화되었기 때문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상품입니다. 상품의 기본 성질은 "대체되는 것"입니다. 상품은 금방 대체되고, 교체되고, 한시 빨리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움 당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상품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대체 가능하고, 교체 가능한 것"이라는 도그마를 기본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생명체는 어떤가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같은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만 해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을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똑같아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생김새, 성격, 취향, 재능, 성향을 타고납니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고유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이지요. 생명체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된 인간은 이러한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만을 평생 수도 없이 듣습니다. "너는 언제든 해고될 수 있고, 네 자리를 빼앗길 수 있고, 우리는 언제든 너를 대신할 노동력을 뽑을 수 있고, 하다못해 너는 기계한테마저 비교당할 수 있으며,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존재다. 너는 얼마짜리 노동력이며 그 정도 값어치의 노동력은 시장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평생 들으면서 자랍니다. 성인이 되고 접한 사회에서도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오직 이런 종류의 메세지들 뿐이죠.


이러한 메세지는 생명체가 가진 본질과 실존을 위협합니다. 현대인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교리에 순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본능적으로 존재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가진 고유성, 존엄성, 대체 불가능성을 드러내고, 표출하고자 그토록 남들과 달라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상품화된 인간이 상품화된 세계 속에 자아를 표출하고자 하는 방식 역시도 상품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며, 오히려 이러한 과정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머릿속에 가득해지고 맙니다.


인간의 상품화라는 실존적 위협이 곧 에고의 늪에 빠진 현대인을 만들고, 자아의 비만을 초래하는 것이지요.




2. 각자도생 경쟁사회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의 논리가 극에 치달은 고도의 경쟁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삶을 오롯이 내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은 지난 600만 년의 시간 동안 서로 돕고, 도움 받으며 살아가는 공동체 생활을 해왔습니다. 공동체가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준 것이지요. 설령 내가 오늘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다 해도 부족의 동료들이 나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다음에 먹을 것을 구하면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려 합니다. 그것이 인간을 살게 해온 인간 사회의 기본 원리였습니다.


전통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의 집을 넘나들며 서로의 안위를 챙기고, 반찬을 만들면 나누어주거나 수확한 작물이 남으면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와주며 공생하는 방향의 생존 방식을 선택해 왔던 동물입니다.


애초에 인간은 혼자서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의 삶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요. 우리는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론 주기도 하면서 상호 부조와 돌봄의 원리에 입각해 살아가야 하는 종족입니다.


그러나 개인을 원자화시키고, 서로가 서로에게 담을 쌓은 채 경쟁자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사회에서는 상호 돌봄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호의에 기대는 대신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해야지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상품화된 사회에선 각자도생밖에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경쟁해야 하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공동체에 관심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내 삶을 내가 책임져야 하므로, 타인의 삶은 관심 밖의 영역이 되므로 나에게만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나의 존재에만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에고이즘이 현대인을 위협하게 된 것입니다.

자아의 비만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상품화된 세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선결 과제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그런 인생, 부럽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