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취업 거부생입니다.
내가 직장인을 거부하는 이유
나는 취업 거부생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거부"라는 단어다. 나는 취업을 수동적으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이다.
내가 취업을 거부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를 한 문장으로 뭉뚱그려 포괄해 본다면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라고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직장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한 것이냐고 물으면 섣불리 그렇다고 일반화 할 수는 없다. 분명 개중에도 스스로 건강하고 자유롭다 느끼는 사람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내가 아는 직장인은 십중팔구 저질 체력에, 기력 없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근감소와 신체능력 퇴화로 10시간씩 앉아 있어도 불편한 줄을 모르고, 아침부터 밤까지 사무실 안 LED 조명 밑에서 인공 재배되는 식물처럼 광합성 부족으로 비타민 D 결핍증을 겪는다.
구내 식당은 이런 환경을 무시한 채 한식 뷔페로 운영되는 곳이 많은데, 지난 번의 사무 보조직 경험 상 아무도 채소 반찬을 담아 먹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식판은 백미밥과 돈가스와 탕수육과 식이섬유 전멸 떡볶이 그리고 제육볶음, 보쌈, 라면의 향연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신체 대사 능력 퇴화 조건은 이미 있는대로 갖춰 놓고 먹는 음식까지 이렇게 먹으면서 무한리필이라니.
당신들은 이걸 복지라고 말하면 안된다. 무리하고 있는 스스로의 장기에게 사과해도 모자랄 수준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요즘은 배불뚝이 아저씨도 옛말이 됐다. 액면가는 스물 후반에서 서른 초중반인데 복부지방은... 마치 개구리에 대한 남모를 동경이라도 품고있는 듯 하다. 하지만 개구리는 그게 정상 체형이고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더구나 개구리는 멀리 높이 뛰기의 달인이다. 이런 생활을 지속하는 인간이 멀리 높이 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코로나가 한창 창궐하기 시작할 무렵, 모범시민으로서 집에만 박혀있느라 신체활동이 대폭 줄어든 탓에 엄청난 근력과 체력 퇴화를 경험했던 나로서는 두 번 겪으라면 돈을 얼마를 준다해도 사양이다.
건강은 당장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신적 신체적 심리적으로 안녕한 상태이다. 인간 관계가 진실되지 못하고 항상 평가의 대상으로 남는 공간에서 심리적 안녕은 뜬 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다. 마음이 편치 못한데 몸이 편할 수 있을리 없다. 더군다나 맞지 않는 동물원에 갇힌 것처럼 살아야하는 생활 환경이라니. 사바나의 사자에게 콘크리트 박스에서 살라고 하면 어떤 사자가 좋다고 하겠는가?사자와 인간이 다르다곤 해도 인간 역시 야생의 초원에서 수백만 년을 살아왔다. 인간도 탁 트인 자연과 자유가 있을 때 가장 신체적 정신적으로 이완을 느낀다.
또한 직장생활은 자유를 빼앗아 가고, 일상을 도피하고 싶은 것으로 만든다.
소소하게는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날 자유부터 시작해 원하는 시간에 식사할 자유,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자유, 낮잠 잘 자유, 건강할 자유, 휴식할 자유, 자녀의 성장을 지켜볼 자유, 여유있게 살아갈 자유... 오만가지 자유가 정규직이라는 이름 아래 박탈당한다.
직장에 다닌다는 것은 한 번 뿐인 인생을 남이 짜 준 시간표에 맞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남이 10시까지 출근해서 6시까지 일하다 집에 들어가라고 하면 그냥 그런 줄 알고 살아야 하는 거다.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인생을 평생 살아야 한다면 누구나 지치고 괴롭기 마련이다.
회사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기 때문에 이미 직원들을 달래기 위한 당근을 마련해 놓았다. 인센티브나 성과급, 휴가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뭐 몇 년 근속하면 얼마동안 유급 휴가를 보내준다는 둥 하면서 굉장히 좋은 복지를 마련해 주는 것처럼 번지르르하게 포장하는데. 이런 건 다 허울 좋은 개소리에 불과하다. 나는 휴가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바로 그 강제 노역을 문제삼고 있는 거다. 그렇게라도 일상으로부터 도망칠 기회만 노리면서 몇 년씩 버텨가며 일하는 건 수감자나 노예의 삶이지 자유인의 삶이 아니다.
삶을 살고 싶은 시간으로 만들고, 일상을 고귀하고 감사한 것, 즐거운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도 모자랄 판에 "빨리 퇴근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빨리 주말이 왔으면 좋겠다" "얼른 휴가내고 여행이나 가면 좋겠다" 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시간을 날려보내고 인생을 단축시키려고 하는 사고에 물드는 것이 좋은 일인가?이렇듯 하나뿐인 자유와 돈을 바꿔치기하며 살아가는 게 직장 생활이다.
직장 생활은 나의 자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까지 억압한다.
내가 집에서 밥 해 먹을 자유를 헌납하고 회사에 와 있는 바람에, 식당 주인의 점심 식사 시간을 빼앗는다. 내가 원할 때 낮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고 질 좋은 숙면을 취할 자유를 헌납했기 때문에, 카페 알바생의 휴식할 자유를 빼앗는다. 에티오피아 커피 농장 사람들의 자유도 빼앗고 방글라데시 공장 노동자의 자유도 빼앗는다. 내 살림 살이 대신해주는 사람들의 자유도 빼앗고, 회사에서 추진하는 사업 뒤치다꺼리 해주는 사람들 자유도 빼앗는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혹자는 "사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들도 먹고산다"고 대꾸한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사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먹고 살 수 있도록 만든 경제"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거다. 전 세계인이 임금 노동에 생계를 의존해야만 하는 사태는 인류 역사상 현대가 처음이다. 돈이 날 먹여 살려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인가? 돈을 벌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파괴하는 사회가 정녕 올바른 사회냐는 물음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스스로 먹고 살 권리를 개개인이 쥐고 있는 사회야말로 건전한 사회다.
먹고 살기 위해 상품 시장 경제에 내 생계를 떠맡기게 될 경우, 자연 착취는 덤이다. 나는 이 "살림의 외주화"가 바로 생태위기와 인권 문제를 동시에 야기한 원인이라고 본다.
우리가 살림살이 원천을 도시에서 보이지 않도록 저 멀리 바다 건너 타지에 외주 맡겼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라면, 새우, 초콜릿, 커피가 어떻게 그 지역의 생태계를 파괴하는지 보지 못한다. 우리가 고기를 먹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외주 맡겼기 때문에 그 사이 발생하는 죽음은 보지 못한다. 우유를 마시려면 젖소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생선을 먹으려면 물살이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다. 도시인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은 공장의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온다. 상품의 원료가 자연에서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꾸 망각한다.
그 좋아하는 휴가를 가기 위해 타는 비행기가 엄청난 양의 탄소를 배출한다는 사실도 모른다. 휴가에 가서 하는 일은 여전히 직장에서 하던 월급 루팡 짓과 다를 바가 없다. 먹고 마시고 소비한다. 그저 무료한 삶에 대한 보상처럼 도파민을 쫓는다.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이 자급자족을 위해 낚시를 할 때는 많은 물살이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팔기 위한 낚시를 할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 많은 물살이를 잡아야 하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물살이를 죽여야 한다. 모두가 많이 팔기 위해 물살이를 더 잡아야 한다면, 멸종은 순식간이다. 자본 시장은 생태계의 순환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자본은 "지금, 당장, 많이"를 요구한다. 사람들의 황금 어장은 시장 경제에 편입되는 순간 죽음의 전쟁터가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업은 자연 보호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 거의 아무도 ESG를 진심으로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 ESG는 사실 그동안 법적 자연적 권리를 침해해 온 기업의 행태를 교묘하게 가려주는 언어 공예다. 마치 공정무역과도 같은 단어다. 무역은 원래 공정해야 맞다. 그런데 공정무역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기존의 무역이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ESG도 마찬가지다. 원래 이윤 추구는 항상 생명의 권리 다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따위 단어가 생겼다는 것은 그동안 기업이 인권을 짓밟고 자연을 착취해왔음을 역설한다. 대기업은 살림의 외주화를 선동하는 권력 그 자체다. 해외에서는 기후파업도 일어나고 있지만 국내에선 요원하다.
지구 공동체의 자유와 건강을 빼앗는 일에 왜 일조하냐고 개인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 나는 외면하기 싫어서 거부를 택했다. 삶의 모순이 나를 더부룩하게 만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도시에서 하릴없이 놀고 먹는 고립된 백수로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겐 자기 효능감을 줄 수 있는 적당한 일이 필요하다. 도시에서는 고용되거나 스스로를 고용하지 않으면 자칫 무가치한 인간처럼 여겨지기 쉽다. 게다가 백수로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도파민 중독적인 도시의 욕망 구조를 건전한 욕망으로 돌릴 수 있는 자연 속 생활이다. 언제든 뛰어들 수 있는 바다가 집 근처에 있고, 항상 새롭게 자라나는 작물이 집 앞 마당에 있다면 심심하다는 이유로 멍청하게 알고리즘이나 들여다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알고리즘은 도시인의 무력함과 무기력을 대변한다.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고, 문만 열면 푸른 텃밭과 나무에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파트는 문을 열고 나가면 회색 아스팔트 뿐이고, 고층이라면 떨어져 죽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가야만 초록이 보인다면 접근성은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한다. 심심할 때는 바다에 나가 백사장을 걷고 싶다. 게임 대신 지구에 접속하고 싶다. 배가 고플 때면 식당 대신 주방으로, 마트 대신 텃밭으로 가고 싶다. 싹이 난 감자를 타박하며 버리는 대신 수십 배로 돌려주는 자연에 감사하며 흙에 심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