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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하 Feb 25. 2022

요가원이라는 작은 학교

아쉬탕가 마이솔 요가에 대해

© natashakasim, 출처 Unsplash



내 직업은 ‘요가 수련생’이다. 물론 어디 가서 신상을 밝힌다면 무직, 백수라고 한다.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아쉬탕가 마이솔 요가 수련생’이라는 어엿한 학생 신분도 있다. 나는 주 5일 아침마다 출석하고, 선생님을 뵙고, 여러 사람과 함께 수련한다. 이만하면 학생들과 제법 비슷한 아침 생활을 보내는 어엿한 수련생이다. 대체 ‘아쉬탕가’, ‘마이솔’이 뭐길래,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수련하는 걸 직업으로 들 정도로 유난이냐는 말도 나올 수 있다. 아쉬탕가 마이솔 요가는 다음과 같다.








‘아쉬탕가’는 보통 요가원에 있는 가장 어려운 요가 중 하나다. 일반 요가원에서도 수련할 수 있지만, 워낙 어려워서 전문 요가원을 찾게 된다. 아쉬탕가는 정해진 단계대로 수행해야만 하고, 근력과 유연성 모두 충족되지 않으면 진도를 나아갈 수 없다. 첫 번째 시리즈에서만 60개 정도의 자세가 나온다. 기본적으로 첫 번째 시리즈 진도를 다 받는 데 1년, 체화하는 데 3년은 걸린다지만 개인차가 크다. 수련을 어느 정도 하면 그 유명한 활자세나 머리 서기는 쉬운 자세에 속할 정도다. 일단 나는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수련 중이고, 그 뒤에 인터미디어트(세컨드), 어드밴스드 A(서드), B, C, D 시리즈까지 총 6단계가 있다.




‘마이솔’은 매일 아침마다, 선생님의 구령 없이 진행되는 요가 수련 방식을 뜻한다. 처음에만 자세를 배우고, 다음날부터는 내가 외워서 해야 한다. 다 같이 모이긴 하지만 자기 진도에 맞춰 각자 수련하는 것이다. 인도 마이솔 지역에서 시작된 방식이라서 마이솔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요가원의 아침 풍경은 학교 교실 속 아침 자율학습 때랑 비슷하다.








요가원에도 학교처럼 같이 수련하는 도반(함께 수행하는 벗)이 있다. 이들도 나처럼 모두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해서 각자 할 수련만 한다. 서로의 이름이나 신상을 물어볼 틈도 없다. 그런데도 매일 보는 사이라서 자연스레 낯을 익히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오랫동안 같이 수련한 도반들을 굳이 기다리진 않지만 이쯤 되면 올 거라고 지레짐작할 수 있다. 만약에 갑자기 오지 않으면 내심 궁금해지기도 한다. 서로 직접 대화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내적 친근감은 쌓을 수 있다.




또 학교처럼 선생님이 계시다. 대신 학교처럼 출석을 부르지는 않는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모든 학생의 이름, 수련 진도, 수련 성향처럼 수련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아침 조회, 종례도 없다. 다만 수련 중간에 앞에 나오셔서 만트라를 선창 하신다. 그러면 학생들 다 같이 만트라를 따라 한다. 만트라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 만물의 평화를 기도하는 일종의 주문이다.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선생님은 나를 매일 만나고, 내 이름을 알고 계시고, 내 수련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하셔야 하니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 격이다.




이 요가 수련 방식은 그래도 학교처럼 1년 단위로 학생의 진도를 구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오래 다녔다고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6년을 해도 1학년일 수 있고, 1년만 해도 중학생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아쉬탕가 수련생들의 수련 기간과 진도가 비례하는 건 아니다.




© claybanks, 출처 Unsplash




애초에 선생님 아래에서 다 똑같은 신분이니 그 어떤 걸로도 계급이 형성될 필요는 없다. 서로 아는 거라곤 수련 진도뿐일 텐데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르게 살다 왔기 때문에 누가 누구보다 잘한다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누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 봤자 전체 시리즈의 절반도 안 된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며 계급 나누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열에 대한 생각이 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생각들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면 다른 수련생들에게도 민폐다. 만일 어렸을 때 친구를 경쟁상대로 삼거나 질투했다면, 이 수련을 통해 그때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날 것이다. 수련을 계속해 나가려면 뼈 빠지게 고생해서라도 고쳐야 한다.




수련은 각자 하는 거라지만 나의 작은 생각 하나마저 다른 사람에게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큰 의미 없이 소란스럽게 굴 수 있다. 지각을 해서 허둥지둥대든, 마음같이 수련이 안 돼서 행동이 격해지든 소란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뭐가 되었든 간에 크고 작은 소란이 돌고 돌아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 설령 상대방이 당장 불쾌감을 느끼지 않더라도, 크고 작은 모든 소란에 눈감아주게 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는 모여서 수련을 하는 게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수련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강박적으로 얌전하고 예쁜 생각만 하며 수련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안 좋은 행위는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는 수련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마음가짐은 상상 이상으로 유용하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를 익히게 되고, 내가 상대방을 배려한 만큼 상대방도 나를 배려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수련실 사람들과 친해지기가 더 편할 수도 있다. 수련생들끼리는 ‘아침마다’, ‘같은 곳에’ 있는 걸 넘어서, ‘서로 배려하며’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한다는 강력한 공통분모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으로 수련 중의 내 모습과 수련실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선생님께서는 수련실 분위기를 위해 지각한 수련생을 꾸지람하실 때도 있다. 수련 태도가 산만하다면 주의를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수련 중에 선생님의 말씀이 적다면 수련 분위기가 좋다는 의미다. 즉, 그만큼 학생들이 수련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선생님의 개입은 한 수련생이 다음 진도를 넘어갈 때나 잘못된 자세를 교정해줄 때면 충분하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도반이 진도를 넘어갈 때 들리는 선생님의 음성을 좋아한다. 내 진도에는 발전이 없더라도 그동안 함께 수련했던 시간이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뿌듯함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련 중엔 당연히 다른 도반에게 과몰입하면 안 된다. 보기 좋아도 수련 중에는 모르는 척해야 한다. 아쉽지만 그게 아쉬탕가 요가의 묘미이기도 하다.




학교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작은 사회를 미리 경험하는 것도 있다.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 등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게 모범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게 쉽지 않다. 그래서 요가는 ‘수준’과 ‘경쟁’이라는 방해 요소를 먼저 제거하고 오로지 내 수련에만 집중하기를 강조한다. 일단 내가 성실할 것, 지각하지 말 것, 나쁜 생각하지 말 것. 이것만 잘 지킨다면 다른 수련생들에게도 충분히 좋은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 아쉬탕가 마이솔 요가는 선생님의 말씀으로 진행되는 다른 요가와 반대로 침묵이 곧 가르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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