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새벽독서 1년 후 나와의 관계 변화
코로나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었던 임신 기간이 처음에는 행복했다. 물론 1년 동안 기다렸던 임신이기도 했지만, 심각했던 코로나 덕분에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신 기간에는 업무 틈틈이 요가도 하고, 이런저런 요리도 해보고, 그동안 배워보고 싶었던 온라인 수업에 참여해 보면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출퇴근을 안 하는 삶을 이때부터 꿈꾸게 되었던 것 같다.
출산 후, 나의 불안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 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육아용품 사는 재미에 빠져 있다가. 점점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가 내 현실과 미래를 적나라하게 알게 했다. 2020년 기준, 3개월의 출산휴가 기간에만 월급이 100% 보장되며, 육아휴 직부 터는 점차 줄어들어서, 마지막 6개월은 100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을 정부로부터 받게 된다(이 모든 과정도 매달 고용센터에 신청해야 한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는 것도 여전히 눈치를 봐야 하는 당연한 현실이었다. 내가 십여 년 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 나라에 낸 세금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 우리나라가 왜 저출산 1위 국가인지 를 아이가 돌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알아버렸다.
같은 맥락에서 회사의 조직개편에 대한 통보가 육아휴직 중이었던 나에게도 압박감을 주었다.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과연 나는 계속되는 조직개편을 피해 갈 방 편이 있을까? 내가 일을 안 하고 남편의 월급만으로 우리가 살 수 있을까? 과연 이 회사에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으며, 이 일은 정말 내가 원하는 걸까?
남들 살듯 살던 내가 육아휴직을 통해 나,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한 근 본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이 질문으로 인해 나의 ‘불안’은 ‘변화’를 욕 구하게 되었고 ‘변화’는 ‘꿈’으로 진화되었다. 나는 꿈꾸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며 넉넉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한마디로 경제적 자유를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다소 즉흥적이다. 일단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서둘러 찾았고 이렇게 만난 인연이 지금까지 1년을 함께 한 새벽 독서 모임이다.
처음부터 이 모임은 많이 달랐던 것 같다. 그냥 모두가 같은 책을 읽었던 기존의 독서 모임들과는 달랐다. 우선 1:1 상담을 거쳐 현재의 내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이 독서 모임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이 무 것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물어보았고, 모든 사람들이 다른 책을 읽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모두 다른 책을 읽는데 어떻게 독서 토론을 할 수 있는 거지? 새벽 5시에 내가 일어날 수 있을까? 중간에 아이가 깨면 어떡하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시작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새벽 5시 기상은 너무 힘겨웠다. 지각을 밥 먹듯이 했고 어 떤 날은 민망해서, 어떤 날은 피곤해서, 어떤 날은 진짜 늦잠으로 못 들어가기도 했다. 혹 들어가더라도 줌을 켜놓고 각자 책을 읽는 이 시 간에 남편이 뒤로 지나가거나 아이가 깨기라도 하면 줌 화면을 커버 리기 일쑤였다. 나는 그만큼 내가 어떻게 보일까 많이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책을 읽고 있던 그 순간에 대한 확 신이 없었던 것 같다. 육아휴직 중인 내가 아이가 우는데 책을 읽고 있어도 될까? 남편에게도 전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고, 내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 는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온 앤 오프를 반복하면서 책을 읽어 나갔다.
열망은 크지만 대가 지불에 인색한 사람의 삶은 빈약하다. 소득 없이 바쁘다. 기대치는 늘 실망으로 전락하고, 불쑥불쑥 자신이 속았다는 낭패감이 밀려든다. 이용당하고, 기만당하고, 평가절하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밀려들면서, 자신이 지금 있으면 안 되는 곳에 있다는 생각이 점점 못 견딜 정도로 강렬해진다
지금 1년을 돌아보니 초기 시작 즈음에 내가 참 잘했던 것은, 그럼에 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붙어있었다는 것이다. 보도 섀퍼의 말처럼 나는 대가 지불에 인색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공허했고 불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잘까? 싶은 날도 늘 나를 벌떡 일어나게 했던 힘은 바로 책 속에서 발견되는 정. 답. 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나는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바쁘게 사는 것에 대한 별 소득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저 일 좀 하는 직원인데 내 시간을 온통 회사에 올인하면서도 그저 그런 평범한 회사원이다. 아이가 태어 나니 여행도 가야 하고, 집도 넓혀 이사도 가고 싶고, 회사에서는 승진도 하고 싶고, 인센티브도 받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은 많아지는데 나는 여전히 바쁜데 별 소득 없는 굴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를 철저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이 필요는 책으로 충족됨을 서서 히 느껴갔다.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내 삶이 처한 문제들을 직시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들여다보니, 내 삶 이 과대포장으로 욕먹는 어떤 과자 봉지같이 느껴졌다. 내용물에 자 신이 없으니까, 계속 포장지를 바꾸는. 결국 그 내용물이 무엇이었는 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화려한 포장지를 벗기고 나서, 만나 게 될 그 내용물을 볼 자신이 없으니까 자꾸만 다시 포장에만 손이 가는 악순환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꿈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가 치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보다 직업, 연봉, 사회적 위치, 명함과 같은 보이는 포장지에 더 손길을 주는 한 보여주기 위한 나로 살게 될 것이라는 불안은 확신으로 다가왔다. 이제 내면의 ‘보이지 않는, 진짜 나’를 키워야만 했다.
나는 이제까지 모든 노력을 기울여 많은 사람들보다 뛰어난 어떤 재능으로써 유명해지고자 했다..(중략).. 어째서 정말로 쓸모 있는 선을 구하지 않는가. 자기가 감복할 수 있는 선이 되어 야지 과시하기 위한 선은 안 된다. 남의 눈을 끄는 것이나, 남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 서로 돋보이려고 과시하는 것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허망한 것이다
1년 동안 책을 읽으면서, 내가 왜 공허하고 불안한지 이해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금씩 성장해 나 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150세 시대의 30대는, 100세 시 대의 20대이고, 80세 시대의 10대이다. (실제 UN에서 청년을 65세까지로 새롭게 규정했다) 100세 시대는 이제 내가 살아갈 시대다. 그렇다면 나는 청년도 아닌, 청소년이기에 아직 살 날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의 나는 남과의 비교가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과거의 나와만 비교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과거의 나에게는 등을 돌리고 미래의 나와만 만나려 한다. 그렇게 ‘나답게 사는 삶’, ‘원하 는 내가 되는 삶’에 집중하니, 내가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아닌 남이 판단의 주체이면 안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했고, 나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갔다. ‘다른 사람들의 서사와 결과에 감탄하기 전에 나 스스로 나에게 감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나약한 정신에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칠 때 가 있다. 아이가 갑자기 아프거나, 회사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나의 결심에 대해서 의심이 들거나, 심지어 날씨가 너무 습한 장마 기간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해야 할 이성이 힘을 쓰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는 보통 감각으로부터 감정이 일어나 고(물론, 반대로 감정에 의해 감각이 영향을 받을 때도 있지만) 이러 한 감정이 이성에 작용하여,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습한 장마 기간에는 몸으로 먼저 습함과 눅눅함을 느끼고, 무기력한 감정이 들고, 운동을 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고, 이러한 행동은 습관이 되어 더 나은 인생으로 가려는 나의 발목을 잡는다.
네 정신을 지배하고 주도하는 이성이 네 육신 안에서 일어나는 부드럽거나 격렬한 움직임 들에 휘둘리지 않게 하고, 그러한 움직임들과 섞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과 분리되어서 철저하게 독립성을 유지하게 하며, 그런 움직임들은 그들의 고유한 영역 내에서만 활동하게 하라. 반면에 유기체에서 늘 그렇듯이, 그러한 움직임들이 다른 고유한 공감 작용에 의해서 너의 정신이나 마음속에서 어떤 감각들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는,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기 때문에, 너는 그 감각들에 저항하지 말고, 네 정신을 지배하고 주관하는 이성이 이런 감각 은 선한 것이고 저런 감각은 약한 것이라는 그 어떤 판단도 거기에 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전히 나의 이성은 감각과 감정에 의해 정신을 주도하지 못할 때 가 많으며,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행동을 선택할 때도 있다.‘이 정도만 하면 충분해. 나는 직장인에 아이도 키우고 있잖아.’라는 자기 합 리화를 위해서만 이성이 사용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내가 예전의 나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네.’ ‘지금은 내 감정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이 안되고 있어.’라고 나에게 말하며 내 정신에 혼쭐을 내기도 하고 심지어 이런 절차 없이 합리화 자체가 아예 없기도 하다. 인지하지도 못하고 감정에만 휘둘려 살던 과거의 나와 비교하면 정 말 대단한 성장이다.
이렇게, 나의 지질하고, 비겁하고, 역경을 겪은 모든 것들이 모두 다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생겼다. 설사 지 금 내가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실패할지라도, 성공으로 가는 길에 나 만의 서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처럼, 문제에는 해답이, 실패에는 성공이 따라올 것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의 포장지를 하나씩 벗겨냈다. 포장지를 벗기고 보니, 씨앗이 들어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줄 씨앗들 이. 그 씨앗을 나에게 정성껏 심는다. 오늘도 나는 나의 씨앗에서 나 의 열매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 열매를 따서 만져보고, 냄새 맡고, 먹 어 본다. 그리고 그 달콤한 감각과 함께 씨를 뿌리고 가꿨던 지난 나에게 감사한다. 옆에 있는 누군가도 나에게 감탄한다. 나는 이미 그 열매를 즐기고 있는 미래의 내가 되어 오늘을 살고 있다.
나는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발견한 것이다.
인용
1) 멘털의 연금술, 보도 섀퍼, 박성원 역, 2020, 토네이도
2) 세네카 인생철학 이야기. 세네카, 김현창 역, 2016, 동서문화사
3) 명상록,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김성숙 역, 2017, 동서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