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이탈로 칼비노와 삿포로 맥주 조합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는 미식의 끝을 사색으로 매듭짓곤 했다. 그 우아한 기록을 훔쳐보며 나 역시 언젠가 음식과 책을 완벽하게 페어링 하는 저녁을 꿈꿨다. 하지만 병원의 소음과 불규칙한 교대 근무 속에서 '사색'이란 늘 유통기한이 지난 사치품 같았다.
근무를 바꾸고서 드디어 맞이한 휴일, 기차역에 가만히 앉아서, 만끽하던 망중한 속에서 나는 비로소 이탈로 칼비노를 펼쳤다. 책 제목은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책장 사이로 낯선 기차역의 서늘한 공기와 자욱한 담배 연기, 그리고 묘하게 식욕을 자극하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소설은 철도역에서 시작된다.
기관차가 증기를 뿜어낸다. (중략) 역의 냄새 속으로 역 안 카페의 냄새가 물결처럼 지나간다. 누군가 뿌연 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다가 카페 문을 연다. 카페 안도 뿌옇기는 마찬가지이다. 시력이 나쁜 사람이나 석탄 가루 때문에 눈이 충혈된 사람 눈에 비친 것처럼. 책의 페이지들이 낡은 기차의 유리창처럼 뿌옇다. 증기 구름이 문장 위로 내려앉는다. 비가 내리는 저녁이다. 한 남자가 카페로 들어선다. 축축한 겉옷의 단추를 푼다. 증기 구름이 그를 감싼다. 빗물에 젖어 반짝이는, 까마득히 멀어져 가는 선로를 따라 기적 소리가 사라진다. 신호를 보내듯 늙은 바리스타가 작동시킨 커피 머신에서, 기관차의 기적 소리만큼이나 요란한 소리와 증기 구름이 몰려온다.
칼비노가 건넨 첫 문장은 일종의 초대장이었다. 나는 그 문장에 이끌려 냉장고를 뒤적였고, 가장 어울리는 '한 접시'를 준비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커피대신 삿포로 맥주. 그것은 화려한 성찬은 아니었지만, 그 소설의 도입부처럼 단단하고도 서늘한, 그러면서도 속은 따뜻하게 데워진 무언가였다.
한 입 베어 물자,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졌다. 병동 복도를 바쁘게 뛰어다니던 발소리, 환자의 손을 잡던 온기, 차갑게 식어버린 도시락의 맛 대신, 지금 이 순간의 미각만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책 속의 여행자가 안갯속을 헤매듯, 나 역시 문장과 음식 사이를 유영하며 잃어버렸던 나만의 '맛'을 되찾기 시작했다.
저녁의 디저트는 역시나 사색이다. 칼비노가 흩뿌려 놓은 이야기의 파편들을 줍고, 그 위에 방금 먹은 음식의 여운을 덧입힌다. 휴가의 밤은 깊어가고, 나는 비로소 누군가의 기록을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닌, 나만의 맛과 문장을 페어링 하는 진짜 요리사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