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재회
비가 온다. 도서관 예약도서를 찾으러 가는 길에 여우비를 만났다. 갑자기 연희동이 생각났다. 이상하게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신촌과 연남동 그 일대를 아주 오랫동안 생각한다. 갈 때마다 버스를 잘못 타고 헤매면서 고생 하는데도 계속 생각이 난다.
우여곡절 끝에 책방을 찾아가고, 음료를 시키고 빌려온 소설을 읽었다. 잠시 목이 뻐근하여 돌리는 찰나 가벼운 충격이 들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한때 내 마음을 온통 먹먹하게 채웠으나, 어느새 일상의 먼지 아래로 흩어져버린 문장들. 르 클레지오의 『조서』를 다시 마주한 건 아주 우연한 찰나였다.
주인공 아담 폴로. 그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인간의 언어를 버리고 사물의 언어를 선택한 사내다. 책장을 넘기다 마주친 "살아 있다는 의식은 그저 물질에 대한 짜증스러운 인식일 뿐이었다"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어떤 고독을 그리도 느꼈을까, 뭐가 그렇게 지겨웠던 걸까. 그리고 작가로서 내가 줍고자 했던 그 수많은 삶의 파편들이 이 한 문장 속에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망설임 없이 내 곁에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책장의 한 자리를 내어주고 이름을 붙여줘야 비로소 매듭 지을 수 있으며 그것으로 안심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책방에서 그냥 빈손으로 돌아 나왔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책을 사지 않은 것은 결코 마음이 변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먹먹함을 박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열람용 책을 그 카페에 남겨두기로 했다. 다음에 다시 그 문장들이 그리워질 때, 다시금 그 먹먹한 공기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싶을 때,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핑계를 남겨둔 셈이다. 서점의 구석진 서가, 내가 잠시 머물다 간 그 자리에 여전히 놓여 있을 아담 폴로의 고독을 상상하며.
소유하는 대신 기다림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내가 걷다가 멈추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번에 모든 것을 가져오는 대신,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그 자리를 서성이는 일. 그 서성임 끝에 다시 만날 문장은 처음보다 훨씬 더 깊은 색으로 나를 물들일 것이다.
다음에 그곳에 가면, 나는 모른 척, 다시 낯선 여행자처럼 그 책을 펼쳐 들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오늘보다 조금 더 담담하게, 그 시절의 나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너무 공감되는 문장과 상황에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었던 그 시기를 지나서 지금, 새콤달콤한 자두복숭아 에이드를 마시며 책장을 훌훌, 넘겼던 것처럼.
그때는 아마 조금 더 빨리 넘길 수 있겠지. 어느 한 장에서 걸려 넘어져도 빠르게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