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2

11. 연기, 김, 글자

by 이단단

오늘은 따뜻했다. 영하의 추위만 느끼다가 오랜만에 맞는 영상의 기온은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종로 11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하루 종일 승하차하는 승객을 태우고 다니느라 바짝 긴장하여 굳은 얼굴의 버스기사는 시동을 끄자마자 나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공터에서 연초를 태우며 긴장을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주민센터 앞에서 수제비를 한 그릇 먹었다.

김가루가 점점이 흩뿌려진 뜨끈한 수제비 한 그릇이 나왔다. 투박하게 떼어 넣은 밀가루 반죽이 입안에서 쫄깃하게 씹힐 때마다 곤두섰던 신경이 비로소 느슨해졌다. 세상의 깐깐한 잣대도, 나를 몰라주는 안목들도 이 김 서린 국물 앞에서는 잠시 힘을 잃는다. 수제비 한 점에 울분을 씹어 삼키고, 국물 한 모금에 다시 시작할 기운을 얻는다.

소화도 시킬 겸 서촌까지 걷는다. ​오후의 볕이 길게 늘어지는 카페 창가에 앉았다. 손때 묻은 책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순간 나로 돌아오는 것 같다. 사번으로 줄 세워지는 게 아닌, 비로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내가 아닌, 온전한 나로 돌아온다. 24년의 다이어리를 완성하여 버리고 새로 하나 장만했다. 가게 스태프들이 직접 그리고 만든 다이어리들이 예뻐서 한참 쳐다보았다. 이걸 하나 다 채우면 또 다른 다이어리를 만질 수 있을까.

메모가 빼곡한 공책 위로 나만의 문장들을 흘려보낸다. 첫 장에는 나에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흡사 다크모드에 갇혀 해제되지 않던 휴대폰의 까만 스크린을 보는 것 같은 먹먹한 마음도, 이곳의 나른한 햇살 아래선 자연스레 빛을 되찾는다. 이래서 사람들이 햇살을 찾나 보다.

​나는 여전히 걷다가 멈추며 파편을 줍는 사람이다. 덩어리째 가지고 있지 못해 잘게 부수거나 부서진 파편을 이어 붙이는 게 더 좋은 사람.

오늘도 그렇게 버려진 마음들을 모으고, 보잘것없는 일상의 조각들을 닦아 문장으로 빚어낸다. 비록 오늘 나의 종이가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잊혔을지라도, 나는 오늘 나를 살리는 법을 배웠다. 따뜻한 수제비 한 그릇의 무게를, 숲의 고요를, 그리고 다시 환해진 내 마음의 조도를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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