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손톱소설] 미인화(未印畵)된 하루
종로 3가의 공기는 늘 눅눅한 쇠 냄새와 타버린 설탕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비릿한 공기 사이를 유령처럼 유영했다. 어깨에 매달린 가죽 가방의 무게가 유독 생경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이 내 마음의 무게라고만 생각했다. 이어폰 너머로 흐르는 노래는 자꾸만 '그래서 그대를 보낼 수밖에 없다'며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낙원상가 아래를 지날 때였을까, 아니면 피맛골의 좁은 입구를 스칠 때였을까. 가방의 지퍼는 이미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퍼가 열린 틈으로 나의 오후가 조금씩 흘러나갔다. 탑골공원 담장 옆에서 바둑을 두던 노인들의 고성(高聲)이 가방 안으로 굴러 들어왔고, 어느 금은방 문틈으로 새어 나온 용접 불꽃의 잔상이 내 낡은 지갑 위에 눌어붙었다.
좁은 골목을 지날 땐 술 냄새를 풍기던 중년의 사내가 내 어깨를 거칠게 치고 지나갔다. 그때 가방이 크게 휘청이며 그 사내의 옷깃에 달린 낡은 단추 하나를 뜯어내 가방 안으로 삼켜버렸다. 나는 사과도, 원망도 하지 못한 채 계속 걸었다. 내 가방이 종로의 파편들을 무분별하게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내 옆에 서 있던 한 어린아이가 내 가방 안을 빤히 들여다보며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엄마, 저 언니 가방에..." 아이의 말은 경적 소리에 묻혔고, 나는 그저 내일이면 더 시끄러워질 서울의 소음을 미리 걱정하며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나의 비밀은 그렇게 타인의 눈동자 속으로 속절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손님, 가방 문 열렸어요."
서점의 정적 속에 던져진 직원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마치 물속에 잠겨 있다가 급히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기분이었다. 나는 황급히 가방을 앞으로 돌려 세웠다. 지퍼는 비명을 지르다 멈춘 입처럼 흉하게 벌어져 있었다.
"아..."
당황하며 가방 안을 더듬던 내 손끝에 낯선 감촉들이 걸렸다. 분명 내 것이 아닌 것들. 아까 그 사내의 옷에서 떨어진 낡은 단추, 어디선가 날아온 전단지 조각, 그리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누군가의 빛바랜 영수증.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낡은 필름 카메라 한 대. 일기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종로의 어느 누군가가 장난처럼, 혹은 간절한 구원 요청처럼 내 가방 속에 이 무거운 철제를 밀어 넣은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 지퍼를 잡았다. '직-' 소리가 나며 지퍼가 끝까지 닫혔다. 서점의 조명 아래서 그 소리는 마치 한 단락의 문장이 마침표를 찍는 소리처럼 단호하게 들렸다. 종로의 그 소란스러웠던 풍경들과 낯선 이들의 흔적들이 비로소 내 가방 안에 유폐되었다.
이제 가방 안은 다시 밀실이 되었다. 내가 잃어버린 일기장 대신 들어온 이 낯선 파편들과 카메라 안에는 어떤 장면들이 현상되지 못한 채 숨어 있을까. 주말의 소음이 시작되기 전, 나는 이 '미인화된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나는 다시 서점 문을 열고 종로의 밤거리로 나섰다. 가방은 이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퍼가 열리지 않도록 가방 끈을 손목에 단단히 감았다. 현실은 늘 이렇게, 내가 의도하지 않은 타인의 삶을 가방 안에 품게 되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