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0. 삼십 분 남은 오후에 멈춰 섰다

by 이단단

광화문.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삼십 분이 남아 있었다. 서 있는 곳은 멀어도 정신적인 거리는 툭하면 집으로 바로 가도 되는 거리로 변해갔다. 친구를 만나고 다리 위에서 괜히 속도를 늦췄다. 오늘 하루 동안 아무 말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듣는 게 익숙해졌다. 내가 원한 자리는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듣는 자리에 서게된다. 10대 때부터 그랬다.

오늘 본 책이 건네 준 말들, 친구를 만나기전에 온 몸으로 느낀 내 일상 등등... 말 하지 않은 문장들이 몸 안에 쌓여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리 난간에 기대서자 물이 보였다. 생각보다 탁했고, 생각보다 빨랐다. 사진으로 남기면 잔잔해 보일 것 같은데, 실제로는 쉼 없이 흘렀다. 방금 전 반짝이던 부분은 금세 사라지고, 또 다른 반짝임이 생겼다. 내가 멈춰 있는 동안에도 물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문득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보내지 않은 메시지, 미뤄둔 결정,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순간들. 다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계속 걷고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멈추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멈춰 서 있으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급해지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당장 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물은 방향을 고민하지 않고 흘렀고, 나는 그걸 지켜보는 사람으로 잠시 남아 있었다.


걷다가 멈추면 알게 된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잠깐의 정지였다는 걸. 잠시 후 다시 걸었다. 아까보다 조금 천천히, 대신 덜 흔들리면서. 또박또박.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오늘 하지 못한 말들을 강물에 다 쏟아부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걷다가 멈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