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

27. 고래

by 이단단


팔목에 코를 갖다 대면 시트러스 향이 난다. 책장에 양보했어야 할 북퍼퓸을 서두르다 내 살에 쏟아버린 탓이다. 종이 위에서 서서히 스며들어야 했던 향기는 내 체온을 타고 본래의 궤도를 이탈해 버렸다. 이 뜻밖의 향기는 나를 아주 먼바다로 데려다 놓는다.


​내 손 안에는 작은 고래 한 마리가 산다. 영롱한 진주 빛깔을 머금은 이 푸른 고래는 마치 바다의 파편을 깎아 만든 듯 매끄럽다. 이 작은 존재를 만지작거리며 문득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떠올린다. 에이허브 선장이 평생을 바쳐 쫓았던 거대한 백고래. 나에게 그 고래는 무엇일까. 지금 쓰고 있는 소설 『파편을 줍는 사람』의 완성일까, 혹은 내가 닿고 싶은 완벽한 삶의 문장일까.


​현재 내 시선이 멈춘 곳은 양귀자의 소설 『모순』의 102페이지. 안진진이라는 여자가 김장우라는 '야생화 같은 남자'를 관찰하며 생의 모순을 감각하기 시작하는 지점. 김장우가 산야의 낮은 꽃들을 줍는 사람이라면, 나는 지금 이 밤의 파편들을 줍고 있다. 내일 13시라는 마감의 압박, 도서관 근로와 신문사 사이의 갈등, 그리고 실수로 몸에 밴 북퍼퓸의 향기까지.


​사주를 보니 나는 '을목(乙木)'으로 태어나 '정화(丁火)'라는 등불을 쓰는 운명이란다. 2월의 차가운 대지 위에서 뿌리를 내리려 안간힘을 쓰는 화초. 그래서일까, 나는 자꾸만 무언가를 흡수하고 싶어 한다. 김장우의 느린 호흡을 흡수하고, 북퍼퓸의 향기를 살결에 입히고, 작은 고래의 푸른빛을 눈에 담는다. 이 모든 입력(Input)은 결국 내 안의 등불을 밝혀 한 줄의 산문을 출력(Output) 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안진진은 말한다.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작은 고래와 책과 함께라면 견디는 시간을 탐험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102페이지에서 멈췄던 항해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내 팔목의 향기가 다 날아가기 전에, 13시라는 바이탈 사인이 울리기 전에, 나는 이 소설의 끝에서 나만의 바다에서 고래를 낚아 올리고 싶다.


​결국 인생이란, 실수로 몸에 뿌린 향기조차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고래의 푸른 등이 오늘 밤 내 책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주길 빌어본다.

작가의 이전글걷다가 멈추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