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

26. 거창 문학소녀의 기억

by 이단단

《서촌의 기억》을 읽었다.


처음 책 추천을 받고, 소개해 준 사람의 글이 마음을 울렸다. 읽으리라 마음먹고 도서관으로 가서 서가 사이를 거닐다 어렵게 빼낸 소설 속에서 '구자윤'과 그가 연모하던 '수희'를 만났다.


아니, 정확히는 수희의 뒷모습에서 엄마를 보았다. 원하던 공부를 하지 못하고 동생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전을 빚고 막걸리를 퍼올리느라 낭만을 잊고 살았는데 그런 사람을 봐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좀 덜 외롭지 않았을까. 담담히 내뱉는 대사를 할 때였다.

나는 수희의 말을 읽으며 엄마의 파편을 헤집고 있었다. 엄마는 꼭 내가 잠들기 직전에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때는 짜증내면서 들었던 이야기가 마치 66년 동안 봉인되었던 사랑을 열어보는 수희의 말 함께, 내 안에서 주 오래전부터 봉인되어 있던 엄마의 시간이 비집고 나왔다.


​나의 엄마는 문학소녀이자 공붓벌레였다. 마거릿 미첼의 두꺼운 소설을 품에 끼고 다니며 직접 쓴 글《바람 풍》 노트를 반 친구들에게 돌리던 문학소녀. 50년대 생이니 초등학교만 나와도 감지덕지인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를 가지마라던 할머니의 호통을 뚫고 기어코 시험을 치르고 학비를 마련하여 제출한 이야기는 내가 상경할 때까지 엄마의 오랜 밤 습관이었다.


하지만 장남의 학비를 위해 자신의 꿈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엄마의 원고지는 결국 대학의 공기를 맡지 못하고 세무서의 딱딱한 장부로, 카페의 얼룩진 탁자로, 그리고 누군가의 발자국을 지우는 청소용 빗자루로 변해갔다. 큰삼촌이 7남매 중 장남이고 하니 대학에 보내겠다는 거였다. 그때부터 엄마의 고단한 노동은 문장을 지워내고 학비를 벌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 지워진 자리를 아빠가 채우고 난 뒤 언니와 내가 태어났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도서관 차가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서 엄마였던, 그리고 수희였던 그 시절의 그녀를 상상한다. 그녀가 포기해야 했던 단어들, 세무서에서 숫자를 기입하며 몰래 삼켰을 문장들, 청소기를 돌리며 마음속으로 지었을 수만 권의 소설들을.
​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다. 주인공은 엄마이기도, 나 자신이기도 하다.


​ 이벤트처럼 손에 넣은 이 책 한 권이, 오늘은 내 삶의 가장 큰 위로가 된다. 나는 이제 도서관 문을 열고 나간다. 엄마가 끝내 마침표를 찍지 못했던 그 소설을, 이제는 내가 '현재'라는 이름의 잉크로 이어 가려한다. 소설은 아니더라도 무엇이 되든 글로 남기려고 한다. 그러면 구자윤처럼 세월이 지나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수신인에게 전해주지 않을까.


수희가 그랬듯, 엄마가 그랬듯, 나 또한 무너진 파편들 속에서 묵묵히 쓴다.

작가의 이전글걷다가 멈추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