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3

05. 비움

by 이단단

오늘은 은희경의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를 다 읽었다. 관계의 냉소와 거리를 다룬 문장들을 덮으며, 내가 가졌던 과거의 역할들도 함께 정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간호사라는 직업 함께 이제는 법학전공 신입생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병원에서 타인의 통증을 돌보던 시간 대신, 이제는 법전의 논리와 지식의 체계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변화의 일환으로 오늘 책 한 박스를 폐기했다. 한때 내 공간을 채웠던 낡은 지식들을 덜어내야 새로운 배움이 들어올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내일은 나머지 책들을 중고 서점으로 보낼 예정이다. 몇 권은 직접 들고 가서 서점 구경도 할 겸 집도 비워야겠다.


​책장을 비우는 사이, 방송대 중앙도서관 장애인 학습실 근로장학생 지원서도 제출했다. 법학도이자 기록자로서, 내가 가진 세심함이 누군가의 학습을 돕는 일에 쓰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비워낸 박스만큼 내 삶이 조금 더 가벼워졌기를, 그리고 그 빈자리가 다시 새로운 사람이라는 이름의 문장들로 차곡차곡 채워지기를 바란다. 이제는 그만 흔들리고 내 삶에 앵커를 내리고 싶다. 글 쓰는 직업으로. 글 쓰는 사람으로. 사회 곳곳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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