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비움
오늘은 은희경의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를 다 읽었다. 관계의 냉소와 거리를 다룬 문장들을 덮으며, 내가 가졌던 과거의 역할들도 함께 정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간호사라는 직업과 함께 이제는 법학전공 신입생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병원에서 타인의 통증을 돌보던 시간 대신, 이제는 법전의 논리와 지식의 체계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변화의 일환으로 오늘 책 한 박스를 폐기했다. 한때 내 공간을 채웠던 낡은 지식들을 덜어내야 새로운 배움이 들어올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내일은 나머지 책들을 중고 서점으로 보낼 예정이다. 몇 권은 직접 들고 가서 서점 구경도 할 겸 집도 비워야겠다.
책장을 비우는 사이, 방송대 중앙도서관 장애인 학습실 근로장학생 지원서도 제출했다. 법학도이자 기록자로서, 내가 가진 세심함이 누군가의 학습을 돕는 일에 쓰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비워낸 박스만큼 내 삶이 조금 더 가벼워졌기를, 그리고 그 빈자리가 다시 새로운 사람이라는 이름의 문장들로 차곡차곡 채워지기를 바란다. 이제는 그만 흔들리고 내 삶에 앵커를 내리고 싶다. 글 쓰는 직업으로. 글 쓰는 사람으로. 사회 곳곳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