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3

20. 이상할 정도로 안온한

by 이단단

어제는 누군가의 무례함 때문에 마음이 뾰족하게 일어섰다. 하지만 오늘, 인왕산 자락에 서자마자 그 날카로움은 폭포 소리에 씻겨 내려갔다.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맑다. 마음은 봄볕을 머금은 것처럼 포근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어제의 나는 어디로 가고, 오늘의 나는 이렇게나 고요한지.


​인왕산의 단단한 바위들은 말이 없었다. 언덕을 오르자 흙과 나무가 가득했다. 나무와 친숙한 나였기에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수백 년을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나는 그 무심한 바위 곁에서 마음의 짐을 하나둘 내려놓았다. 한양을 지키던 우백호의 기운이 내 안의 소란을 잠재워 준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산과 나, 둘만 남겨진 그 적막함이 나를 다독여 준 것일까.
​산을 내려와 광화문으로 향했다. 책장 사이를 거닐다 만난 문장 하나. ‘우는 나와 우는 우는’. 그 제목이 마음을 툭 건드렸지만, 책을 집어 들지는 않았다. 며칠 뒤면 도서관에서 내게로 올 책이다. 굳이 지금 소유하지 않아도 그 문장은 이미 내 마음속에 하나의 단단한 파편이 되어 박혔다. 벌써부터 함부로 그 슬픔을 짐작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빈손으로 서점을 나오는데, 오히려 발걸음이 가벼웠다. 책도 사지 않았고 시계도 사지 않았지만, 내 안은 그 어느 때보다 꽉 찬 기분이다.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이 홀가분함이 오늘 내가 주운 가장 귀한 파편일지도 모르겠다.
​손목은 허전하지만, 내 마음의 초침은 이제야 제 속도를 찾은 것 같다. 머리가 맑고 마음이 포근한, 이 낯설고도 다행스러운 오늘을 기록해 둔다. 나중에 다시 세상이 나를 흔들 때, 이 단단한 평온함의 기억을 꺼내어 다시 나를 다독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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