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3

21. 용두

by 이단단

​방 안의 공기는 서늘하고 코끝은 여전히 간지럽다. 남산타워가 빨간색으로 몸을 달구며 미세먼지의 습격을 경고하던 밤, 나는 광화문의 화려한 소음에서 빠져나와 나의 조그만 책상 앞에 앉았다. 불과 몇 시간 전,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톱스타들의 무대를 보며 느꼈던 그 고양감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그 괴리감 사이에서 나를 붙잡아준 건 역설적이게도 오늘 완독 한 박완서의 문장들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벌레'가 되지 않기 위해 증언의 책무를 다짐했던 그 서늘한 각오. 전쟁통에 폐허가 된 텅 빈 서울 거리에서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에 전율하던 스무 살의 그녀와, 빨간 남산타워 아래에서 언론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하는 서른두 살의 나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화려한 무대 위 주인공이 되지 못해도 좋다. 나는 그 무대 뒤의 공허를 읽어내고, 빨간 남산타워가 내뱉는 경고의 의미를 기록하며, 타인의 삶 속에 흩어진 파편들을 줍는 사람이 되고 싶다. 증언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라는 그 문장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내일의 나를 위해 가장 세밀한 의식을 치른다.
​내일 아침, 수백 명의 인생이 걸린 시험장의 '시간 수호자'가 되기 위해 아날로그시계의 용두를 뽑는다. 스마트폰의 숫자와 시계의 초침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00초의 순간,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째깍거리는 이 정교한 소리는 내일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카운트다운이 될 것이고, 나에게는 언론인이라는 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소리가 될 것이다.
​재채기가 잦아든다. 코끝의 간지러움보다 미래에 대한 예감이 더 선명해지는 밤이다. 나는 이제 정확하게 맞춰진 초침 소리를 자장가 삼아, 벌레의 시간이 아닌 '증언자의 시간' 속으로 침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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