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3

22. 일일교탁

by 이단단

시험이 끝난 교실의 화이트보드는 무정할 만큼 깨끗하다. 한때 누군가의 당락을 결정지었을 날카로운 숫자들과 정교한 시간표, 그리고 긴박했던 지시사항들은 지우개의 마찰 아래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드 위엔 완전히 지워지지 못한 문장의 파편들이 희미한 얼룩으로 남아 있다. 필사적으로 적어 내려갔던 누군가의 간절함이나, 그 시간을 통제하던 서슬 퍼런 규칙들이 유령처럼 떠돈다.
​가득 채워져 있을 때보다 비워져 있을 때 더 많은 말을 하는 것들이 있다. 오늘 하루 종일 '선생님'이라는 견고한 가면을 쓰고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움직였던 나의 시간도, 저 화이트보드 위의 얼룩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건, 건조한 지우개 가루와 텅 빈 사각형의 적막뿐이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정적만이 가득한 이 사각형의 공간을 마주하며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 완벽하게 통제된 시간표 밖으로 걸어 나와, 이제야 내 안의 슬픈 노래를 틀어줄 자격을 얻은 기분이다.
​텅 빈 보드 위로 내일의 또 다른 숫자들이 적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공허함조차 온전히 나의 것이다. 지워지기 쉬운 자국들 사이로, 나는 오늘도 나만의 소리 없는 파편을 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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