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일일교탁
시험이 끝난 교실의 화이트보드는 무정할 만큼 깨끗하다. 한때 누군가의 당락을 결정지었을 날카로운 숫자들과 정교한 시간표, 그리고 긴박했던 지시사항들은 지우개의 마찰 아래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드 위엔 완전히 지워지지 못한 문장의 파편들이 희미한 얼룩으로 남아 있다. 필사적으로 적어 내려갔던 누군가의 간절함이나, 그 시간을 통제하던 서슬 퍼런 규칙들이 유령처럼 떠돈다.
가득 채워져 있을 때보다 비워져 있을 때 더 많은 말을 하는 것들이 있다. 오늘 하루 종일 '선생님'이라는 견고한 가면을 쓰고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움직였던 나의 시간도, 저 화이트보드 위의 얼룩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건, 건조한 지우개 가루와 텅 빈 사각형의 적막뿐이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정적만이 가득한 이 사각형의 공간을 마주하며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 완벽하게 통제된 시간표 밖으로 걸어 나와, 이제야 내 안의 슬픈 노래를 틀어줄 자격을 얻은 기분이다.
텅 빈 보드 위로 내일의 또 다른 숫자들이 적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공허함조차 온전히 나의 것이다. 지워지기 쉬운 자국들 사이로, 나는 오늘도 나만의 소리 없는 파편을 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