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3

23. 잠영

by 이단단

향유고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빛이 닿지 않는 심해로 내려간다. 수심 2,000미터, 수압이 온몸을 짓누르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적막한 어둠 속이 고래의 사냥터이자 안식처다.
​고래는 그곳에서 요란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거대한 몸을 정지시킨 채, 오직 초음파를 내쏘며 보이지 않는 길을 찾을 뿐이다. 수면 위에서 반짝이던 윤슬이나 소란스러운 파도 소리는 그 깊은 곳까지 닿지 못한다.
​지금 나의 무기력도 어쩌면 이런 심해의 잠영 아닐까.
세상의 경쟁과 압박, SNS의 소음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온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가라앉아 멈춘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나는 이 어둠 속에서 나만의 초음파를 쏘며 다음 행선지를 더듬고 있는 중이다.
​심해 고래는 영원히 아래에만 머물지 않는다. 폐 속에 남은 산소를 다 쓰고 나면, 고래는 다시 수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솟구쳐 오른다. 그리고 가장 거칠고 시원한 숨을 내뱉는다.
​나도 지금은 이 깊고 어두운 수압 속에 몸을 맡기고 있지만, 다시 숨이 차오르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는 오늘 모아둔 이 정적의 힘으로 더 높이 솟구쳐 오를 수 있겠지.
​지금은 그저 고래처럼, 이 깊은 고요를 견디며 가만히 떠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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