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시선이 머물러야 비로소 완성되는 문장들
소리는 공기를 타고 등 뒤를 파고들지만, 수어는 오직 마주 보는 두 눈 사이의 직선 위에서만 존재한다. 오늘 서울도서관에서 내가 마주한 첫 번째 수어 수업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방관의 대화'를 허용하며 살아왔는지를 통렬하게 깨닫게 해 주었다. 소리는 귀로 흘려보내며 시선을 다른 곳에 둘 수 있지만, 수어는 상대의 눈과 표정, 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의 미세한 꺾임에 나의 온 생애를 집중해야만 비로소 한 문장이 완성된다. 상대의 눈을 피하는 순간 대화의 경로는 미아가 되고, 마음은 길을 잃는다. 삼십 년 이상 상대의 목소리로 시작하고 끝내던 관성이, 오늘 농인 선생님의 고요한 손짓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서로를 붙드는 시선의 연대였다.
신기하고, 어렵고, 또 이상하리만치 재밌었다.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토록 지독하게 눈을 맞춰본 적이 있었던가. 이 즐거움을 감히 '재미'라 불러도 될지 망설여졌지만, 그것은 분명 작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지평이 넓어질 때 느껴지는 순수한 희열이었다. 소리에 기대어 살던 낡은 언어 체계를 허물고, 손끝으로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다정한 해방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온 길 위에서 만난 주황색 해치는 오늘 내가 배운 '무언의 소통'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하루를 시간당 급여로 계산하며 쫓기듯 살아온 나의 조바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해치는 아무런 조건 없이 커다란 품을 내어주었다. 보드라운 인형의 촉감이 핑크색 재킷 소매 안으로 스며들 때, 피로가 서린 나의 어깨는 비로소 가벼워졌다. 손끝으로 전해지던 고요한 대화의 여운이 해치의 품속에서 몽글게 퍼져 나갔다.
오늘 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본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앞머리와 새로 입힌 검은 머리칼, 그리고 수분아래로 차오르는 생기. 이 모든 '꾸밈'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향한 가장 다정한 예의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4월의 면접과 도전한 곳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초조함조차, 오늘 배운 수어의 고요와 해치의 온기 속에 잠시 잦아든다. 시선이 머물러야 완성되는 언어처럼, 나 역시 이제야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늘 나의 밤은 소리 없는 다정함으로, 그리고 내일을 향한 선명한 확신으로 깊어간다.